[딜사이트 이소영 기자] 구글 모회사 알파벳이 100년 만기 채권, 이른바 센추리본드(century bond)를 찍었다. 모집액의 10배에 가까운 자금이 몰릴 만큼 시장은 열광했다. 투자자들은 구글의 미래에 '한 세기'라는 시간을 기꺼이 베팅한 것이다. 투자은행(IB) 업계에서 100년물 채권 발행은 단순한 조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자본 조달의 수단이기 이전에 기업과 시장이 맺는 백년가약의 결과라서다.
알파벳이 100년이라는 만기를 선택한 이유는 명확하다. 수십 년에 걸친 인공지능(AI) 인프라 투자 회수 기간을 고려할 때, 조달 만기를 그만큼 뒤로 밀어야 재무적 유연성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금리 변동 및 리파이낸싱 리스크 역시 사실상 한 세기 동안 락인(Lock-in) 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
그렇다면 투자자는 왜 100년이라는 긴 세월을 기다릴까. 연기금과 보험사 같은 장기 부채를 안고 있는 기관들에게 초장기물은 귀한 대안이어서다. 특히 알파벳처럼 현금 창출력이 압도적인 기업의 채권은 국채 이상의 안전자산으로 대우받고 있다. 즉 수요와 공급이 알맞게 어울어진 결과다.
하지만 시선을 돌려 국내 시장을 보면 풍경이 사뭇 다르다. 국내 회사채 시장의 최장 만기는 여전히 10~30년물 수준에 머물러 있다. 국채조차 50년물이 최대치인 상황에서 민간 기업의 100년물은 아직 상상의 영역이다.
배경은 구조에 있다. 한국 기업은 업황 사이클에 민감하고, 지배구조 리스크에서도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100년 뒤에도 이 기업이 같은 위상을 유지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확신이 따르지 않는 이유다. 원화가 기축통화가 아니라는 점 역시 초장기물의 가치 보존에 한계를 남긴다. 국내 연기금과 보험사는 이러한 조건을 감안할 때 100년물은 아직 부담이 크다고 판단한다.
결국 센추리 본드 발행은 개별 기업의 성적표가 아니라 그 국가 자본시장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의 의미를 갖는다. 통화의 신뢰도, 지배구조의 투명성,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장기 투자 생태계가 모두 갖춰져야 비로소 발행될 수 있는 훈장인 셈이다.
최근 고대역폭메모리(HBM)와 AI 반도체로 글로벌 수요를 흡수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떠올리고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이들이 막대한 AI 실탄 확보를 위해 글로벌 시장에서 100년물 채권을 발행하고, 전 세계 연기금이 그 채권을 담기 위해 줄을 서는 장면 말이다. 아마 그건 비단 두 기업의 승리가 아니라, 한국 자본시장이 세계 경제의 핵심 인프라로 공인받는 순간일 것이다. 이 상상이 망상이 아닌 머지않은 미래의 현실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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