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조은비 기자] 대한민국 석유화학 산업의 심장부인 울산과 여수가 멈춰 서면서 기업들이 미래 성장 동력으로 공언했던 '친환경'과 'ESG'마저 생존을 위협하는 모양새다. 본업에서 벌어들인 현금으로 미래를 산다는 석화업계의 공식이 깨지면서, 야심차게 추진되던 수조원대 신사업들은 이제 기업의 존립을 압박하는 재무적 부담이 됐다.
이로 인해 SK지오센트릭이 추진하는 '울산 ARC(재활용 클러스터)' 등 신규 프로젝트가 주춤하고 있고 신사업의 원료가 되는 폐플라스틱마저 시멘트사에 빼앗기는 등 석화사의 이중고가 심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업계에 따르면 LG화학은 2021년 90%를 상회하던 석유화학 부문 가동률이 최근 급격히 하락하며 본업의 경쟁력이 흔들리고 있다. 순수 석화 비중이 높은 롯데케미칼 역시 2021년 90%대에 달했던 에틸렌 가동률이 중국발 증설 공세와 수요 부진이라는 이중고를 맞으며 업계 전체가 가동 중단 위기에 직면했다.
실제로 한국신용평가에 따르면 석화 9개사의 2025년 합산 영업손실은 1조187억원으로 전년 대비 적자 폭이 확대되었다. 특히 LG화학은 주력인 LG에너지솔루션 실적을 제외할 경우 사상 처음으로 연간 영업적자(-1652억원)를 기록하며 업계에 충격을 더했다.
이러한 본업의 몰락은 미래 사업인 '울산 ARC(재활용 클러스터)' 등 신규 프로젝트의 발목을 직접적으로 잡고 있다. SK지오센트릭이 추진하는 울산 ARC는 약 1.8조원을 투입해 폐플라스틱에서 뽑아낸 '열분해유'를 기존 공정에 다시 투입하는 친환경 프로젝트다.
그러나 돈줄인 기존 설비가 가동 중단 위기에 처하면서 투자는 사실상 멈춰 섰다. 설령 수조원을 들여 공장을 완공한다 해도, 열분해유를 받아줄 본업 설비가 멈춰 선다면 미래 투자는 존재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는 2026년 이후로 완공을 미뤘으나, 현장에서는 본업 공장 가동률이 30% 이상 빠진 상황에서 조 단위 투자를 강행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문제는 기업들이 당면한 시간의 압박이다. 정부의 2030년 NDC(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에 따라 국내 석화사들은 2030년까지 자원 순환 비율을 30%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이 수치는 단순한 환경 보호를 넘어 유럽 등 글로벌 시장의 수출 규제를 뚫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하지만 현실은 생존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조차 한계에 다다른 상태다.
국내 기업들은 당장 2030년 목표를 맞추기 위해 조 단위 돈을 써야 하는데, 정작 이 규제를 주도했던 유럽조차 최근 경기 침체를 이유로 환경 규제를 하나둘 뒤로 미루거나 완화하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유럽 국가들조차 전기차나 환경 규제를 수정하거나 취소하는 분위기인데, 우리만 생존을 담보로 무리한 목표를 고수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이어 "회사가 망해가는 상황에 열분해유 투자는 돈은 많이 들고 수율도 안 나온다"며 "일반 납사 공장도 안 돌아가는 상황에 이를 추진하는 건 사실상 자멸과 다름없다"고 덧붙었다. 또 "ESG도 회사가 살아남아야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생존 경쟁에 뛰어든 상황이라 내부적으로는 ESG라는 단어 자체가 금기시되는 분위기"라고 덧붙였다,
실제 롯데케미칼의 경우 부채비율이 2021년 50% 수준에서 2025년 3분기 75.7%까지 상승하며 재무 구조가 악화됐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과거엔 장갑도 빨아 쓴다는 말이 나왔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심하게 마른 수건을 쥐어짜고 있다"며 "미래를 위한 투자가 오히려 기업의 목을 조르는 모순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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