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딜사이트 이세정 기자]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옛말이 있다. 필연적인 변화의 법칙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하지만 세상은 10년이라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할 정도로 급변하고 있다. 오히려 매일 매일이 상전벽해(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변한다는 의미)라는 말이 더 와닿는다.
이런 상황에서 유독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곳이 있다. 명확히 따지면 업체들은 절실하게 변화를 바라고 있지만,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있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업계 분위기 상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다.
철도업계가 형식승인 제도를 도입한지 올해로 12년차에 접어들었지만, 강산이 바뀐다는 세월 동안 한 차례도 제도 개선이 이뤄지지 않았다. 해당 제도는 2012년 철도안전법이 전면 개정된 이후 2014년부터 현장에 적용됐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철도차량이나 용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승인 받아야 하는 절차가 3단계에서 8단계로 늘어났다.
형식승인 제도는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전부터 많은 우려를 낳았다. 철도 운행의 안전성을 높인다는 취지에는 동의하나, 철도산업 발전을 저해하는 방해물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 쏟아졌다. 그렇다고 대놓고 불만을 제기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사실상 돈줄을 쥔 정부가 추진하는 법이라 심기를 거스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철도차량을 제작할 때 설계 승인과 성능시험만 거치면 양산이 가능했다. 하지만 형식승인 제도가 도입된 이후 설계가 적합한지 여부를 확인하는 검사부터 형식승인, 제작자승인, 완성검사 등 복잡한 이중 삼중의 단계를 이행하고 있다. 초기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는 "해당 제도에 큰 문제가 없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라고 밝혔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정부가 귀를 막고 있다"는 성토가 쏟아지기도 했다.
물론 완벽한 법은 없다. 때문에 수차례 개정을 거쳐 빈틈을 채운다. 철도안전법의 경우 2004년 제정된 이후 올해까지 50차례 가까운 업그레이드를 거쳤다. 하지만 형식승인 제도와 관련한 규정은 2014년 첫 시행 이후 그대로 따르고 있다. 2016년부터는 철도 부품에도 형식승인 제도가 적용되기 시작했다.
형식승인 제도가 10년 넘게 유지되면서 그 피해는 고스란히 생산업체로 전가되는 양상다. 열심히 철도차량을 만들어 납품했지만, 기일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지체상금이 부과되거나 계약서상 대금을 온전히 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정말 여유를 부리다 납품일을 맞추지 못했다면 덜 억울했을 것이라는 자조적인 반응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취재 과정에서 접촉한 업체 대부분은 형식승인 제도의 구조적인 결함을 꼬집고 있다. 제도 자체가 불완전하다는 지적이다. 형식승인 신청자는 총 8번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승인권자의 수정 요청이 한 번이라도 발생하면 후속 단계는 줄줄이 지연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형식승인을 담당하는 기관이 한국철도기술연구원 1곳 밖에 없는 데다, 승인권자에 따라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된다는 점은 납품 지연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특히 형식승인 제도는 대기업보다 충분한 자금 여력을 갖추지 못한 중소·중견업체에 더욱 가혹하다. 정부가 발주한 철도차량 납품 지연에 따라 국내 철도 업체들이 지불한 벌금(지연료)의 경우 애초에 1조원을 훌쩍 넘겼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그렇다고 형식승인 제도를 없애자는 게 아니다. 실제로 해당 제도가 도입된 이후 철도차량 사고 비중이 급격히 줄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국토부에 따르면 국내에서 발생한 전체 철도사고 발생건수는 2014년 209건에서 지난해 43건으로 10년 새 80% 가량 감소했다. 설계와 제작 단계에서의 철저한 품질 관리가 실제 성과로 이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철도차량 제조사와 부품사의 자구 노력만으로는 형식승인 제도에서 기인한 여러가지 문제점을 해소할 수 없다는 점이다. 결국 정부가 직접 나서야 한다. 이미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미비점을 보완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철도산업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형식승인 제도의 중복 절차를 고치거나, 납기일을 현실적인 수준으로 조정하는 방식이다. 부디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철도 형식승인 제도가 실효성 있고 현실성 있는 제도로 변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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