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최령 기자] 국내 산업계에서 '피지컬 AI'가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 텍스트와 이미지 생성에 머물던 기존 인공지능을 넘어, 실제 물리 환경을 인식하고 판단해 움직이는 AI가 제조·물류·로봇·모빌리티 현장으로 들어오면서 기업들의 관심이 한꺼번에 쏠리고 있다. 반도체·자동차·배터리·조선 등 고난도 제조 공정이 밀집된 한국 산업 구조상, AI 경쟁의 초점이 알고리즘 성능을 넘어 '현장 적용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AI업계에 따르면 피지컬 AI란 센서·카메라·라이다 등을 통해 주변 환경을 인식하고 수집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스스로 판단해 로봇 팔이나 이동체 같은 구동장치를 움직이는 인공지능 시스템을 말한다. 정해진 명령을 반복 수행하는 자동화 로봇과 달리, 작업 중 발생하는 변수에도 대응하는 자율성이 핵심이다. 산업계가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람의 숙련과 경험에 의존하던 공정을 AI가 학습하고 일부 대체할 수 있다면 생산성과 안전성을 동시에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변화는 글로벌 산업 현장에서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글로벌 기업 폭스콘은 공장을 디지털 트윈으로 구현해 조립·결착 같은 미세 공정을 가상 공간에서 반복 학습시키고 있으며 BMW와 테슬라는 휴머노이드 로봇을 제조 현장에 투입해 실제 작업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다.
다만 이런 흐름 속에서도 빅테크들이 공통적으로 맞닥뜨리는 한계는 '실제 산업 데이터'다. 인터넷에서 확보할 수 있는 텍스트나 이미지와 달리, 고정밀 제조·물류 데이터는 현장을 보유한 기업만이 축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한국 기업들의 전략이 갈라진다. 게임과 시뮬레이션 기술을 기반으로 피지컬 AI에 접근하는 NC AI는 가상 환경에서 학습한 지능을 현실로 옮기는 '심투리얼(Sim2Real)' 문제를 핵심 과제로 삼고 있다. 대규모 가상 세계를 설계하고 AI를 강화학습시켜 온 경험을 산업용 로봇 학습으로 확장해 가상 환경에서 충분히 검증한 뒤 이를 실제 공정과 로봇에 적용하는 구조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단일 로봇 개발이 아니라 모델·시뮬레이션·데이터·현장 실증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는 접근이다.
이런 시도는 민간 주도의 'K-피지컬 AI 얼라이언스' 컨소시엄으로 이어졌다. 최근 NC AI는 정보통신기획평가원이 주관하는 '피지컬 AI 모델 학습을 위한 월드 파운데이션 모델 기술개발' 과제에 참여하며 관련 핵심 기업들을 모은 'K-피지컬 AI 얼라이언스'를 공개했다. 컨소시엄에는 로보틱스·시뮬레이션·데이터·AI 모델 기업과 연구기관이 참여하고, 삼성·롯데·포스코·한화 등 대기업이 수요처로 가세해 기술 개발과 산업 현장 실증을 동시에 추진한다. 연구 성과를 실험실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곧바로 제조·물류 현장에서 검증하는 구조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기존 AI 연구 과제와 결이 다르다는 평가다.
플랫폼 기업들의 접근 방식도 구체화되고 있다. 네이버는 디지털 트윈과 클라우드 기술을 피지컬 AI와 결합하는 전략을 택했다. 엔비디아의 로봇 시뮬레이션 플랫폼을 활용해 가상 환경에서 로봇 동선과 작업을 먼저 검증하고, 이를 실제 도시와 건물 운영으로 확장하는 방식이다. 사옥과 스마트 빌딩에서 로봇 배송과 관제 시스템을 운영하며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실외 환경과 해외 신도시까지 실증 범위를 넓히고 있다. 로봇 자체 개발보다는 로봇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과 운영 체계를 AI로 최적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 행보다.
카카오는 모빌리티 플랫폼을 기반으로 피지컬 AI 영역을 넓히고 있다. 카카오모빌리티는 택시·배차 중심의 기존 사업 구조에서 벗어나 자율주행과 로봇 배송을 차세대 성장 축으로 설정했다. 플랫폼이 축적해 온 이동 데이터와 관제·경로 생성 노하우를 실제 도로 환경과 로봇 서비스에 적용해, 도심형 피지컬 AI 모델을 구축하겠다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조직 내 피지컬 AI 전담 부문을 신설하고 자율주행·로보틱스 분야 인재 영입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SI 기업들은 피지컬 AI를 '현장 운영'의 문제로 바라보고 있다. LG CNS는 로봇과 AI를 결합한 피지컬 AI 및 로봇 전환(RX) 사업을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육성하고 있다. 제조·물류·스마트시티 현장에서 로봇을 사전 학습시키고 이기종 로봇을 하나의 플랫폼으로 통합 운영하는 서비스 모델을 확대하는 방식이다. 현장에서 생성되는 데이터를 다시 학습에 활용해 로봇 지능을 고도화하는 구조도 함께 구축하고 있다. 삼성SDS 역시 반도체·전자 제조 현장의 물류와 공정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로봇과 장비가 스스로 판단하고 제어하는 지능형 제조·물류 시스템 구축에 주력하고 있다. 복잡한 공정과 물류 흐름을 AI가 이해하고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처럼 국내 기업들이 피지컬 AI에 동시에 주목하는 배경에는 공통된 인식이 깔려 있다. 알고리즘 경쟁만으로는 차별화가 어려워졌고 결국 승부처는 '현장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느냐'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산업 데이터와 실증 환경을 갖춘 기업, 이를 묶는 컨소시엄 구조가 동시에 움직이면서 피지컬 AI는 기술 유행을 넘어 산업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제조 강국으로 축적된 현장 경험을 어떻게 지능화할 것인지가 한국 기업들의 다음 과제가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피지컬 AI는 로봇을 새로 만드는 문제가 아니라, 산업 현장에서 축적된 경험과 데이터를 어떻게 지능으로 전환하느냐의 문제"라며 "알고리즘 경쟁을 넘어 실제 공정과 물류를 이해한 기업들이 주도권을 쥘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피지컬 AI는 데모보다 현장 실증이 훨씬 중요하다"며 "공장에서 실제로 돌아가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다시 학습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먼저 만든 쪽이 시장을 선점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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