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김주연 기자] 젠슨 황 엔비디아 CEO의 방한으로 엔비디아와 K-반도체 간 연결고리는 한층 견고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국내 반도체 업체들은 안정적인 수요 기반을 확보했고, 엔비디아 역시 AI 반도체 수요 급증 속에서 핵심 메모리 공급망을 선제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되면서다.
다만 업계에서는 이번 만남을 단순한 협력 강화로만 볼 수 없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엔비디아 중심의 AI 생태계가 확대될수록 국내 업체들의 종속 가능성 역시 커질 수 있어서다. 이에 메모리 공급에 머무르지 않고 차세대 제품 개발과 아키텍처 설계 단계부터 참여하는 전략적 협력 관계 구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황 CEO는 지난 5일부터 8일까지 이어진 방한 기간 동안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 전영현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장 부회장 등을 잇달아 만나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특히 이번 방한에서 그는 SK그룹과 AI 데이터센터 인프라 및 차세대 메모리 개발 협력을 공식화했으며, 삼성전자와도 HBM4E, HBM5를 비롯한 차세대 메모리와 파운드리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이에 업계에서는 황 CEO의 이번 방한을 단순한 HBM 확보 차원이 아닌 AI 반도체 주도권 경쟁의 연장선으로 보고 있다. AI 가속기 성능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핵심 부품인 HBM 확보 능력이 중요해지는 만큼, 국내 메모리 업체들과의 협력 관계를 한층 공고히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업계에 따르면 AI 가속기 칩에서 HBM이 차지하는 원가는 40%에 달한다.
실제 AMD와 인텔 등 경쟁사들도 고용량 HBM을 탑재한 AI 가속기를 앞세워 엔비디아 추격에 나서고 있다. 이에 차세대 AI 칩 원가에서 HBM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높아진 만큼 안정적인 메모리 공급망 확보 여부가 향후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엔비디아가 SK하이닉스, 삼성전자와의 협력을 강화하는 배경에도 차세대 '베라 루빈' 플랫폼에 필요한 메모리 공급망을 선제적으로 확보하려는 전략이 자리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황 CEO 역시 메모리 공급 부족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지난 8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기자들과 만나 SK하이닉스의 생산능력 확대 계획에 대해 "두 배로 늘리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며 AI 수익화가 본격화될 경우 차세대 메모리 수요가 공급을 웃돌 수 있다고 전망했다.
게다가 엔비디아 입장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대체하기 어려운 전략적 파트너다. AI 가속기 성능 경쟁이 심화될수록 HBM 비중이 커지고 있지만, 대규모 물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업체는 사실상 두 회사뿐이기 때문이다. 특히 차세대 AI 서버에서는 HBM뿐 아니라 HBF(고대역폭플래시), 소캠(SoCAMM) 등 고성능 메모리의 중요성이 함께 커지고 있다. 엔비디아가 추진 중인 차세대 플랫폼 역시 메모리 대역폭과 용량 확대를 전제로 설계되는 만큼 안정적인 공급망 확보가 필수적이다.
이병훈 포스텍 반도체공학과 교수는 "메모리 반도체 공급 부족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있는 만큼 주요 기업들이 선제적으로 공급망 확보에 나설 수밖에 없다"며 "엔비디아 역시 핵심 공급사와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방한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입장에서도 협력 강화는 긍정적이다. AI용 메모리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지만 생산능력 확대에는 수조원 규모의 투자가 필요하다. 장기 공급 계약은 수요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투자 부담을 낮출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양사와의 관계 설정 방식에는 차이가 감지됐다. 황 CEO는 이번 방한을 통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사이에서 묘한 '밀고 당기기(밀당)'을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황 CEO는 최태원 회장과 컴퓨텍스 2026, 방한 기간 동안 잇달아 만나며 긴밀한 협력 관계를 과시했다. 컴퓨텍스 2026 현장에서는 SK하이닉스의 HBM4E 웨이퍼에 직접 서명하기도 했다.
반면 삼성전자와는 상대적으로 차분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일각에서는 '삼성 패싱' 논란도 제기됐지만, 황 CEO가 미국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만났다고 언급한 데 이어 방한 마지막 날 전영현 부회장과 회동하면서 물 밑 소통은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에 업계에서는 엔비디아가 양사 간 경쟁 구도를 활용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공급망 안정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납품 경쟁을 유도해 협상력을 높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승현 라이너 AI 에반젤리스트는 "엔비디아가 중간에서 양사를 저울질하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제살 깎기 경쟁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경쟁사지만 서로 업계 표준을 만들면서 일정 부분 협조할 필요가 있는 만큼 엔비디아와의 관계에 대한 전략적인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게다가 엔비디아와의 협력 강화가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엔비디아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투자와 제품 개발 방향 역시 엔비디아 로드맵에 맞춰지는 '락인' 효과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위치가 고착화될수록 결국 공급자로서 '을(乙)' 위치에 머무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업계에서는 이번 방한에서 한국 업체들 역시 실리를 따질 필요가 있다는 조언이 나온다. 단순 메모리 반도체 공급자 위치를 넘어서 엔디비아와 함께 아키텍쳐를 만들어 가는 동업자로 나아가야 한다는 조언이다. 이 에반젤리스트는 "황 CEO와 협업할 필요는 있지만 너무 부화뇌동할 필요는 없다"며 "차세대 AI 가속기에서는 메모리 반도체가 더 중요해지는 만큼 우리나라 업체들이 단순 HBM 공급자에서 엔비디아와 공동 설계자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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