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이진철 편집국장] 최근 경제계에서 '깐부'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깐부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어떤 경우에도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사이'라고 나온다. '깐부'는 2021년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명대사로 유명해졌지만 온라인 게임이 없었던 어린시절 동네골목에서 딱지치기나 구슬치기를 할 때 지역마다 달리 불리던 '짝지', '동무'의 요즘 표현에 가깝다. '네거, 너꺼가 없다"는 오징어게임의 그 대사처럼 딱지나 구술을 많이 따는 실력있는 친구와 새끼손가락을 걸며 '깐부'라는 은밀한 경제(?) 동맹을 맺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난달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간 중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깐부치킨 회동이 화제가 된 이후 한국을 찾는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의 발걸음이 눈길을 끈다. 젠슨 황 CEO에 이어 방한한 ASML의 크리스토프 푸케 CEO, 메르세데스-벤츠의 올라 칼레니우스 회장은 인공지능(AI)·반도체·전장 산업의 지도를 새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무게감을 더한다.
젠슨 황 CEO는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한국 국민을 기쁘게 할 선물을 가져간다"고 말했고, 방한한 자리에서 그래픽처리장치(GPU) 26만개라는 선물을 내밀었다. 공짜도 아닌 "다른 나라보다 먼저 공급하겠다"는 약속이 전부였다. 하지만 AI 시대의 산소통이라 불리는 GPU를 쥔 엔비디아 앞에서 한국 제조업의 대표주자인 삼성과 현대차조차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세계 유일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제조사 ASML의 푸케 CEO도 지난주 한국을 찾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고위경영진을 만났다. 미국의 규제로 중국 수출길이 막힌 상황에서 한국은 ASML에 가장 중요한 고객이다. 그가 들고 온 '하이-NA EUV'는 대당 5000억원을 넘는 초정밀 장비인데 공급량은 한정돼 있고, 경쟁은 치열하다. 삼성과 하이닉스는 이 장비를 얼마나 빨리 확보하느냐에 미래 공정 경쟁력의 성패가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르세데스-벤츠의 칼레니우스 회장 역시 LG와 삼성의 최고경영진을 만나 배터리·센서·디스플레이 등 전장 부문 협력을 논의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이미 15조원 규모의 차세대 배터리 계약을 체결했고, 삼성도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차량용 부품 공급 관련 논의를 이어갔다. 차세대 전기차용 배터리와 자율주행 등 미래 모빌리티 분야 전반에서 한국의 전장 산업이 글로벌 완성차업체의 핵심 파트너로 부상하고 있다는 점은 반가운 일이다.
AI·반도체·전장 산업의 흐름을 좌우하는 글로벌 기업 CEO의 잇단 방한은 AI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미래 산업의 공급망이 한국을 축으로 재편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국이 '기술을 생산하는 나라'라기보다 '기술을 조달하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되짚어봐야 한다. 미래 제품의 설계와 표준, 브랜드라는 핵심 권한은 여전히 해외 기업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호황에 힘입어 올 3분기 GDP 성장률 1.2%(속보치)라는 '깜짝 성장'과 코스피 4000포인트 시대를 열었지만, K-제조업이 '부품 공급자'의 틀 안에 갇혀 있는 한 그 온기는 중소기업과 내수시장으로 흘러들지 못한다.
어린 시절 구슬치기와 딱지치기에서 맺었던 깐부도, 거대한 무역전쟁에서 맺어지는 글로벌 기업간 깐부도 결국 실력 좋은 친구를 통해 자기 이익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점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글로벌 기업들과의 '깐부 동맹'이 지속 가능하기 위해선 K-제조업 스스로의 경쟁력 강화가 핵심이라는 현실을 직시하고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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