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이세정 기자]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사상 최대 규모의 국내 투자를 결정한 배경에는 이재명 정부가 이끌어낸 한미 관세 협상 타결이 주효했다는 분석이다. 현대차그룹은 미국이 한국산 완성차와 부품에 대한 관세율을 기존 25%에서 15%로 낮추기로 결정하면서 연간 3조원 이상의 손실을 방어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특히 정 회장의 이번 국내 투자는 의리와 실속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결단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 노력에 대한 감사함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는 동시에 미래 모빌리티 경쟁력 강화에 더욱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 수 있을 것으로 기대돼서다.
◆ 대통령, 7대 재계 총수와 합동회의…정의선 "국가 경제 기여에 이바지"
17일 정부와 재계 등에 따르면 이재명 대통령은 전날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에서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를 열고 7개 그룹 재계 총수들과 만남을 가졌다. 이날 자리에는 정 회장을 비롯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정기선 HD현대 회장,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 여승주 한화 부회장이 참석했다.
이 대통령은 한미 관세 협상과 관련해 "좋은 조건을 위한 능동적 협상이 아닌, 나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한 방어적 협상이었기 때문에 매우 어렵고 부담스러운 과정이었지만 방어를 잘 해낸 것 같다"며 "정부와 기업이 이 정도로 합이 맞아 공동 대응한 사례는 없었다는 평도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 대통령은 "혹시 대미 투자가 너무 강화되면서 국내 투자가 줄어들지 않을까 그런 걱정을 한다"면서도 "가급적이면 국내 투자에 지금보다 좀 더 마음 써 주시고, 지역 지방의 산업 활성화를 위해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이날 정 회장은 "한미 협상 타결로 인해 글로벌 강국으로 도약할 기회를 마련해 주신 이 대통령과 정부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현대차그룹의 노력이 국가 경제 기여에 이바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답했다.
◆ 2030년까지 125.2조원 투입 '유례 없는 금액'…美 관세 위기감 방증
현대차그룹은 내년부터 2030년까지 5년간 총 125조2000억원을 국내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주목할 부분은 현대차그룹의 이 같은 중장기 투자 계획은 역대 최대치라는 점이다. 실제로 현대차그룹이 직전 5년(2021~2025년)간 국내에 투자한 총액은 89조1000억원으로, 이번 발표액은 36조1000억원 가량 상회한다. 특히 125조5000억원을 연평균 금액으로 환산하면 25조4000억원인데, 직전 5년 연평균 투자액 17조8000억원을 40% 이상 상회한다.
앞서 주요 기업들은 새 정부 출범에 맞춰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해 왔으며, 현대차그룹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예컨대 현대차그룹은 2014년 박근혜 정부 시절 2015년부터 2018년까지 총 80조7000억원의 투자 계획을 발표했으며, 2018년 문재인 정권 당시에도 5년(2018~2022년) 동안 23조원의 투자를 약속했다. 아울러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2022년부터 2025년까지 63조원 상당의 돈보따리를 국내에 풀겠다고 공표했다.
하지만 유독 이재명 정부에서 투자 규모가 늘어난 이유로는 그만큼 미국 관세 부과에 따른 위기감이 컸다는 점을 의미한다. 실제로 현대차·기아는 관세 영향을 그대로 받아낸 올 3분기 3조원의 관련 손실을 지출했다. 올 2분기 양사 합산 1조6000억원의 피해를 입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5조원에 육박하는 관세 비용을 문 것이다. 그 결과 올 상반기 기준 7.8%이던 현대차의 영업이익률은 8%포인트(p) 하락한 7%였으며, 같은 기간 기아는 10.1%에서 8.4%로 1.7%p 빠졌다.
나이스신용평가는 현대차그룹의 관세 리스크가 지속될 경우 연간 8조4000억원의 비용 지출이 불가피하다고 전망했다. 다만 관세가 15%로 낮아질 경우 비용 5조3000억원으로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 정부 노력 감사 뜻 전하면서 모빌리티 리더 입지 강화 발판 마련
현대차그룹의 이번 국내 투자는 ▲신사업 분야 50조5000억원 ▲연구개발(R&D) 투자 38조5000억원 ▲경상투자 36조2000억원씩 각각 단행될 예정이다. 정 회장은 이번 투자로 글로벌 모빌리티 선두주자 위상을 한층 공고히 하면서 정부 기대에 부응하는 효과를 거둘 것으로 전망된다.
먼저 신사업 투자는 인공지능(AI)과 로봇, 소프트웨어 중심의 자동차(SDV), 전동화, 수소 등에 집중된다. AI 기술 고도화를 통해 AI·로봇 혁신 생태계를 조성한다는 게 골자다. 그린 수소 생산을 위한 수전해기 개발은 물론, 수소 AI 신도시가 조성되도록 정부 등과 협의한다는 계획이다. 아울러 전동화 역량 강화를 위해 주행거래 900km 이상의 EREV(주행거리 연장형 전기차) 등 파워트레인과 라인업도 다각화할 예정이다.
R&D의 경우 모빌리티 산업 경쟁력을 강화할 신제품과 핵심 분야 기술 개발을 확보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으며, 경상투자는 글로벌 혁신거점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기대되는 현대차그룹 글로벌 비즈니스 콤플렉스(GBC) 건설 비용 등으로 쓰이게 된다.
특히 정 회장은 지방 균형 성장과 상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재명 정부의 정책 기조도 따른다. 예컨대 현대차그룹은 ▲동남권(울산, 창원) ▲서남권(광주, 전주) ▲중부권(아산, 진천, 서산, 충주, 천안) ▲대경권(대구, 경주, 김천) ▲경기(화성, 광명, 평택)에 완성차 공장 및 부품 공장을 운영 중이다. 해당 공장들에서는 향후 5년간 수십종의 신차 투입을 위한 라인 고도화가 이뤄질 계획인데, 이에 따른 고용효과가 동반될 것으로 보인다.
정 회장은 "현대차그룹은 올해 7200명을 채용했으나, 내년에는 이 수치를 1만명으로 늘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 지방·상생도 챙긴 정의선…실 투자액 '125조2000억원+α'
정 회장은 미국 관세로 심각한 경영 위기에 놓인 협력사도 지원한다. 먼저 현대차·기아의 1차 협력사가 올해 부담하는 미국 관세를 소급 적용해 전액 지원하며, 다양한 상생 협력 프로그램을 2·3차 협력사로까지 확대한다.
먼저 현대차그룹은 현대차·기아와 직접 거래하는 1차 협력사가 부품을 현대차그룹 미국 생산법인(HMGMA,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 기아 조지아 공장 등)에 공급하는 과정에서 실제 부과되는 관세를 매입 가격에 반영한다. 1차 협력사가 관세비용을 보전하는 만큼 2·3차 협력사의 자금 위기도 상당 부분 해소될 것이라는 게 지배적인 시각이다.
현대차그룹의 총 지원 규모는 향후 1차 협력사의 수출 실적이 집계된 이후 확정될 예정이다. 특히 현대차그룹의 협력사 지원은 기 발표한 5개년 국내 투자와는 별개로 진행된다. 다시 말해 현대차그룹의 국내 투자 비용은 '125조2000억원+α'인 것이다.
나아가 현대차그룹은 국내 자동차 산업 생태계를 위한 신규 지원 프로그램도 개발한다. 또 공급망 안정화를 위해 협력사의 원자재 구매와 운영자금 확보, 이자 상환을 지원하며 해외 판로 개척과 수출 확대 등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신규 투자와 R&D, 스마트 공장 도입, 안전·보안 관리 체계 구축도 가속화하도록 지원한다.
이에 정 회장은 "관세 부담이 증가하면서 어려움을 겪는 부품 협력사를 위해 올해 부담하는 대미 관세를 소급 지원하는 등 자동차 산업 생태계 강화를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부연했다.
한편 미국 정부는 지난달 29일 한미 정상이 합의한 무역 합의 세부 내용이 담긴 '조인트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를 이달 14일 발표했다. 공동 설명자료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산 자동차와 한국산 자동차부품에 대한 무역확장법 232조 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기로 했다. 업계는 관세 인하가 이달부터 소급 적용되더라도, 기 수출 재고에 25%의 관세가 이미 적용돼 있어 실제 효과는 12월부터 나타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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