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신지하 기자] 대한전선이 LS전선의 해저케이블 기술을 빼돌렸다는 의혹을 놓고 진행 중인 경찰 수사가 1년 넘도록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영업비밀 침해 사건 특성상 혐의 입증이 까다워 수사가 장기화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모회사인 호반그룹과 LS그룹은 수사 결과에 따른 유불리를 따지며 향후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물밑에서 치열한 기싸움을 벌이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경기남부경찰청 산업기술안보수사대는 LS전선의 해저케이블 기술 유출 의혹과 관련해 대한전선과 가운종합건축사무소 관계자 등을 부정경쟁방지법 및 영업비밀보호법 위반 혐의 등으로 수사하고 있다. 지난해 7월부터 11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압수수색을 벌였고 피의자 소환 조사도 진행했다. 경찰 관계자는 "수사 중이라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기 어렵고 결과 발표 시기도 확정된 게 없다"며 "최대한 신속하게 수사해 마무리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경찰 수사가 초반 속도를 내면서 업계에서는 늦어도 올해 상반기에는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최근에는 이달 내 결론이 날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됐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공개 특허가 아니라 비공개 영업비밀 침해 혐의인 만큼 대한전선이 LS전선의 기술을 실제로 탈취했는지를 입증하기 어려워 수사 결론이 지연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해당 사안에 정통한 업계 한 관계자는 "1년 넘게 수사가 이어진 만큼 이달 중에는 결론이 나올 것이라는 얘기도 있었다"면서도 "영업비밀 침해는 특허 분쟁과 달리 객관적 증거 확보가 쉽지 않아 수사기관이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결과가 어느 쪽으로 기울든 수조원대 민사 소송으로 번질 가능성이 큰 만큼 업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 사건은 대한전선이 충남 당진 해저케이블 공장 건설을 가운종합건축사무소에 맡기면서 불거졌다. LS전선은 2007년 세계에서 네 번째로 초고압 해저케이블을 개발했고 2009년 국내 최초로 전용 공장을 준공했다. 가운종합건축사무소는 2008~2023년 LS전선 해저케이블 공장 1∼4동의 건축 설계를 전담했으며, 이후 대한전선 당진공장 건설에도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기술 유출 의혹이 제기되며 LS전선과 대한전선 간 갈등이 표면화했다.
당시 LS전선은 "기술 탈취가 사실로 밝혀진다면 국내외에서 가능한 모든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며 강경 대응 방침을 밝혔다. 이에 대한전선은 "혐의가 없다고 판명될 경우 가능한 민형사상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라며 맞섰다. 업계에서는 대한전선의 기술 유출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양사 간 소송전은 불가피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LS전선이 해저케이블 설비 구축과 연구개발에 1조원이 넘는 자금을 투입한 점을 고려하면 소송 가액도 조 단위에 달할 가능성이 있다.
경찰 수사가 1년 넘게 이어지는 사이 대한전선과 LS전선의 갈등은 모회사인 호반그룹과 LS그룹 간 대결 구도로 번지고 있다. 호반그룹은 계열사를 동원해 LS 지분을 4% 안팎까지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하림그룹마저 우군으로 끌어들였다. 하림 계열사 팬오션은 지난 5월 LS 주식 7만6184주(지분율 0.24%)를 122억7900만원에 매입했다. 팬오션은 이번 지분 인수에 대해 '단순 투자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과거 하림그룹이 HMM 인수전에 나섰을 때 호반그룹이 백기사로 나서 자금을 지원했던 점을 거론하며 이번 매입도 호반그룹에 힘을 실어주려는 조치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상법상 3% 이상의 지분을 보유한 주주는 임시 주주총회 소집 청구권과 주주제안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내부 경영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회계장부 열람권도 갖게 된다. 이에 따라 호반그룹이 이들 법적 권한을 적극 활용해 대한전선과 LS전선 간 분쟁에서 유리한 자료를 확보하려 하거나, LS그룹을 압박할 만한 요구를 제기할 수도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다만 LS그룹의 지배구조를 고려하면 호반그룹이 단기간 내 경영권을 위협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지난해 말 기준 구자열 LS 이사회 의장과 특수관계인 43명이 LS 지분 32.1%를 보유하고 있으며, 유사시 우호 지분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자사주도 15.1%에 달한다. 이를 종합하면 오너 측의 실질 지배력은 47%에 이른다.
LS그룹도 호반그룹의 행보에 맞서 한진그룹을 우군으로 끌어들이며 방어에 나섰다. LS는 지난 5월 자사주를 담보로 대한항공에 650억원 규모 교환사채(EB)를 발행했다. 재계에서는 이를 두고 양사의 동맹이 호반 견제를 염두에 둔 조치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한진그룹도 호반이 한진칼 지분을 매입하며 경영권을 위협받고 있어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는 분석이다.
LS그룹 오너 일가도 움직였다. 구자은 LS 회장을 비롯해 구자열 LS그룹 이사회 의장, 구자철 예스코 회장, 구자용 E1 대표, 구자균 LS일렉트릭 회장, 구은희씨(구자엽 LS전선 회장 장녀) 등은 다음 달 22일부터 한 달간 보유 중인 LS에코에너지 지분 전량을 처분하기로 했다. 매각 규모는 677억원에 이른다. 이들은 지분 매각 사유로 '재무 유동성 확보와 계열사 지분 매입'을 들었지만 업계에서는 LS 지분 확보 자금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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