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정동진 기자] 벤처캐피탈(VC) 투자 방식으로 정착된 전환상환우선주(RCPS)가 시간이 지나면서 비상장 기업에 부담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만기 도래에 따른 스텝업 부담 외에도 기업공개(IPO)를 통한 상장 절차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12일 한국벤처투자협회에 따르면 VC의 우선주 투자는 지난 2017년 1조2000억원에서 2023년 3조7000억원으로 크게 늘었다. 우선주란 CPS·RCPS를 뜻하는데, 최근에는 대부분 RCPS 형태로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 이들은 보통 회사채나 유상증자를 통한 자금조달이 어려운 비상장사들이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발행하는 경우가 많다.
비상장사에 대한 우선주 투자는 몇 년 새 벤처투자업계의 대세로 자리잡았다. 2018년 이전엔 연간 투자금액의 50%를 넘지 못했지만, 벤처투자가 급증한 2021년 약 73%(5조6000억원)까지 증가했다. 이후 70% 내외의 비중을 유지 중이다. 반면 보통주 투자는 지속적으로 줄면서 17~18%의 비중만을 차지하고 있다.
VC들이 RCPS를 선호하는 이유는 투자자 우위의 복합금융상품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RCPS는 말 그대로 상환(redeem)과 전환(convert)이 모두 가능한 우선주다. 채권과 같이 원금에 이자를 더해 돌려받거나, 회사 상장 시 보통주로 전환하는 것 모두 가능하다. 즉 투자사의 상황에 따라 유연한 대응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들은 비상장사에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RCPS는 보통주나 영구채와는 달리 만기가 존재해 자금 조달 압박이 발생한다. 상장사의 회계기준인 K-IFRS상 부채로 취급돼 IPO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SK에코플랜트는 지난 2022년 발행한 4000억원 규모의 RCPS로 인해 상장 압박을 받고 있다. 만약 SK에코플랜트가 오는 2027년 6월까지 상장을 마무리하지 못하면 배당률이 매년 2%씩 스텝업된다. 투자은행(IB) 업계는 CPS로부터 발생하는 배당금을 합산할 경우 SK에코플랜트에 발생할 수 있는 부담금이 연 800억원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만약 재무적투자자(FI)와 협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SK에코플랜트는 다소 낮은 가치평가 속에 쫓기듯 상장을 단행하거나, 수백억원에 이르는 배당금을 지불해야 할 것으로 전망된다.
RCPS 만기가 코앞으로 다가온 플린트 역시 고민이 깊다. 플린트는 2014년 RCPS로 60억원의 자금을 조달했을 당시 기업가치가 300억원이었으나, 현재 3000억원으로 9배 증가했다. 이로 인해 올해 연말 만기가 도래하는 RCPS 상환을 위해서는 약 500억원의 자금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하지만 플린트는 지난해 말 기준 현금성 자산이 200억원에 불과한 상황이다. 게다가 업계에서는 RCPS의 보통주 전환을 위한 IPO도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최근 RCPS 투자로 인해 비상장사의 IPO 진행까지 어려움을 겪는 분위기다. 지난해 파두 사태 이후 거래소의 심사 기조가 기업의 상장 가능성을 높이는 방향에서 꼼꼼한 심사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면서, VC들이 RCPS의 보통주 전환에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IPO를 진행하는 비상장사 입장에서 RCPS의 보통주 전환은 필수적이다. 상장을 위해서는 기존 K-GAAP에서 K-IFRS로 회계기준을 전환해야 하는데, RCPS가 K-GAAP에서는 자본으로 인정되지만 K-IFRS는 부채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에 VC들은 그동안 원활한 상장을 통한 엑시트를 목표로 보통주 전환에 협조해왔다.
그러나 지난해 단 한건도 없었던 상장 미승인 기업이 올해 6건으로 늘어나는 등 심사 기조가 엄격해지면서, VC들이 보통주 전환에 협조하지 않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IB업계에 따르면 최근 상장을 추진하고 있는 A사는 거래소에서 RCPS를 보통주로 전환하겠다는 확약서를 받아오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VC로부터 협조를 받지 못했다. 상장이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RCPS라는 '꽃놀이패'를 놓지 않는 편이 리스크 관리에 도움이 되는 까닭이다.
이로 인해 IB업계에서는 비상장사의 IPO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RCPS 미전환으로 인해 비상장 기업의 자금 조달에 악영향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날 기준으로는 상장 예비심사를 신청한 52곳 중 21곳이 RCPS의 보통주 전환을 완료하지 못한 상태다.
IB업계 관계자는 "VC들이 RCPS의 보통주 전환에 응해주지 않는 것은 해당 기업에 대한 불안감으로 비칠 수 있다"며 "비상장사의 RCPS가 보통주 전환이 되지 않으면 자본 잠식이 발생할 수 있고, 자본 잠식이 되면 관리종목 사유가 되는 만큼 심사 단계부터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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