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김규희 차장] 흔히 벤처캐피탈(VC)을 일컬어 자본시장 전선에서 가장 트렌디하고 유연한 조직이라고 말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자본의 속성 자체가 늘 혁신과 자율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한국벤처캐피탈협회의 내부 시계는 어찌 된 일인지 여전히 거꾸로 흐르는 모양새다. 시장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데 협회의 인사 시스템은 과거 관치금융 시대의 낡은 관행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최근 벤처캐피탈 업계에 따르면 협회는 이준희 상근부회장의 임기를 1년 더 연장하는 방향으로 내부 의견을 모으고 있다. 이 상근부회장은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시절 기획조정실장을 지낸 고위 관료 출신이다. 2022년 9월 취임 이후 기본 임기 2년에 연임과 자동 연장을 거쳐 이미 4년의 임기를 채웠다. 주무부처인 중기부의 엄호 아래 통상적인 임기 체제를 넘어선 4연임 시도가 본격화하자 업계 안팎에서 강한 반발이 나오고 있다. 특히 중기부가 협회에 이 상근부회장의 유임을 종용했다는 소문까지 파다하여 업계의 우려가 깊다.
사단법인인 한국벤처캐피탈협회는 이사회와 총회를 거쳐 상근부회장을 선임하는 절차를 거친다. 업계 인사라면 누구나 상근부회장에 오를 자격이 있다. 그러나 그동안의 역사를 보면 실상은 전혀 달랐다. 협회 상근부회장직은 줄곧 중소기업청이나 중기부 출신의 고위 관료들이 독점해오다시피 했다. 실제로 2002년부터 24년이 지난 지금까지 상근부회장을 지낸 인사 모두 중기부 출신이다. 협회가 집행하는 일부 사업 예산을 중기부가 지원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주무부처가 사실상 인사권을 대행해 온 관행 탓이다. 이번 임기 연장 역시 협회의 자율적 권한 대신 정부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협회의 장기 집권 과정은 석연치 않은 규정 개정과 특혜 의혹으로 얼룩졌다. 협회는 2024년 임기 만료를 앞두고 후임자가 없으면 임기가 자동 연장되도록 예외 조항을 신설했다. 이 규정은 지난해 중기부의 인선 지연을 빌미로 이 상근부회장의 임기를 자동으로 늘려주는 발판이 됐다. 이번 연임이 확정되면 이 상근부회장은 과거 경력을 포함해 사실상 10년치에 달하는 거액의 퇴직금을 받게 된다. 회원사들이 낸 소중한 회비가 특정 개인의 장기 집권과 퇴직금 증액에 쓰인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물론 이 상근부회장이 재임 기간 벤처투자 촉진법 개정을 주도하고 모태펀드 출자 규모를 연간 5000억원대 수준으로 방어한 공로는 인정받을 만하다. 고금리와 경기 침체 속에서 대관 능력과 정책 연속성이 필요하다는 신중론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성과를 냈더라도 인사의 불투명성과 비정상적인 임기 연장은 조직의 건강성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특정 관료 출신이 주무부처의 입김을 등에 업고 협회를 좌지우지하는 구조는 청산해야 할 구태다.
이제 벤처캐피탈협회는 밀실 인선과 관치 행정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해결책은 명확하다. 상근부회장직을 민간에 개방하고 투명한 공개채용 방식을 도입하는 것이다. 급변하는 고금리 환경 속에서 모험자본 시장의 생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회원사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정부에 전달할 수 있는 현장 전문가가 지휘봉을 잡아야 마땅하다. 정권이나 주무부처의 입김에 따라 흔들리는 고질적인 낙하산 구조로는 시장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결국 본질은 협회의 정체성 찾기다. 협회는 정부의 하부 집행 기구가 아닌 회원사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순수 민간 단체다. 관료 출신 인사의 안위나 부처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시장의 자율성이 희생되는 구조를 방치한다면 벤처 생태계 전체의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관행이라는 이름의 안주를 택할 것인가, 투명한 인적 쇄신을 통한 진정한 독립을 이뤄낼 것인가. 지금 VC협회에 필요한 것은 정부의 눈치가 아닌 시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담대한 결단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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