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조은비 기자]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국내 항공 방산의 대표 플랫폼 기업으로 자리잡은 지 20년이 넘었지만, 최근 대형 사업에서는 존재감이 약해지는 모습이다. 전투기(KF-21)와 헬기(수리온) 등 고정익·회전익 기체 개발 역량은 업계에서 확고한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지만, 대형 체계사업에서 요구되는 '통합 제안 능력'과 '전략 의사결정의 속도'에서는 약점이 반복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최근 방산 사업의 경쟁축이 기체 중심 구조에서 임무장비·전자전·네트워크 기반 통합 역량으로 이동하면서, 기체를 중심으로 성장해온 KAI의 기존 모델은 변화한 시장 환경과 완벽히 맞물리지 못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1조9200억원 규모의 전자전기 개발사업이다. KAI는 한화시스템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참여했지만, LIG넥스원·대한항공 컨소시엄에 밀리며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내줬다. 업계에서는 이를 단순한 점수 차가 아니라, 오랫동안 유지돼온 'KAI(기체) + LIG넥스원(임무장비)'의 전통적 분업 구조가 처음으로 역전된 사건으로 본다.
LIG넥스원은 전자전·임무장비 기술력을 바탕으로 체계 제안의 주도권을 확보했고, 대한항공은 해외 비즈니스제트기 개조 역량을 더해 장비·플랫폼 결합의 완성도를 높였다. 반면 KAI는 기체 제작·운용 역량은 충분했지만, 임무장비·전자전·네트워크 통합 등 체계종합의 핵심 영역에서 뚜렷한 우위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한 방산업계 관계자는 "이제는 플랫폼 하나만 잘 만든다고 대형 사업을 가져오는 시대가 아니다"라며 "전자전기 사업은 방산 생태계의 중심축이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지를 보여준 상징적 사례"라고 말했다.
이 같은 흐름은 기술 경쟁력 문제를 넘어 KAI 내부의 의사결정 구조와도 연결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최근 KAI가 직면한 근본적 문제를 '역량'보다 '의사결정 체계의 불안정성'에서 찾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번 패배의 배경으로 KAI의 대표이사 공백 장기화를 지목하지만, 내부 노동조합은 전자전기 결과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에는 선을 그었다.
KAI 노조 관계자는 "전자전기 제안서는 이미 7월 초 제출된 상태였기 때문에 사장 공백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긴 어렵다"면서도 "사장 부재 이후 의사결정 속도가 느려진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권 변화 때마다 임원단 교체 폭이 컸던 전례가 있어 임원들이 판단을 스스로 강하게 밀어붙이기 어려운 구조가 됐다"며 "컨트롤타워가 부재하면 특정 사업을 더 밀어붙이는 톤 조정 자체가 사라진다"고 설명했다.
방위사업청이 "디브리핑 이후 KAI의 이의제기가 없었다"고 밝힌 점도 업계에서는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전자전기 결과가 "큰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다"는 해석과 "의사결정 리스크 때문에 적극적인 대응이 어려웠다"는 해석이 동시에 제기되는 이유다.
KAI는 최근 UH-60 개조, 천리안위성 5호 등 주요 사업에서도 기대와 달리 연달아 고배를 마셨다. 특히 UH-60 개조사업은 내부에서도 "당연히 우리가 가져올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던 사업이었지만 결과는 달랐다. 노조는 "대응이 전반적으로 느렸던 건 맞다"고 인정했다.
천리안 사업의 경우 KAI는 평가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며 공식 절차를 진행한 것으로 확인됐다.
KAI는 경공격기·훈련기 분야의 경험을 바탕으로 경쟁력이 충분하다고 판단해 적극적으로 대응했지만, 최종 평가에서 원하는 점수를 확보하지 못했다. 노조는 이에 대해 "평가 과정에서 억울한 부분이 있다고 판단해 회사가 이의제기를 진행했다"며 "다만 초기 대응 방향을 정리하는 데 시간이 다소 걸렸다"고 말했다.
KAI는 현재 5개월 넘게 대표이사가 공석 상태다. 표면적으로는 사업과 생산 모두 정상 가동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내부에서는 전략·수주·개발 등 핵심 기능의 의사결정 속도가 느려졌다는 증언이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KAI가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체 중심 모델에서 벗어나 임무장비·전자전·네트워크까지 아우르는 통합 제안 역량을 확보해야 한다"며 "사장 공백과 같은 조직적 변수에도 흔들리지 않는 의사결정 체계의 안정성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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