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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키운다며 '옥상옥'…모태펀드 힘 빠진다
이준우 기자
2025.12.15 07:00:15
150조 국민성장펀드 등장에 20년 노하우 한국벤처투자 '찬밥' 신세
이 기사는 2025년 12월 12일 06시 05분 유료콘텐츠서비스 딜사이트 플러스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딜사이트 이준우 기자] 한국벤처투자(KVIC) 모태펀드가 존재감이 줄어들 위기를 맞았다. 20년간 벤처 생태계의 수도꼭지 역할을 자처해왔지만 정부가 150조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를 새롭게 내세우면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탓이다. 겉으로는 첨단전략산업 육성을 내걸었으나 업계에서는 오랜 기간 축적된 민간 투자 노하우가 사장되고 관(官) 주도의 '공룡 펀드'가 그 자리를 대체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예산정책처마저 정책 자금의 중복 투자 가능성을 지적한 상황에서 벤처 생태계의 기초 체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8일 벤처캐피탈(VC) 업계에 따르면 내년도 모태펀드 출자 사업에서 AI 분야 비중이 축소될 것이란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정부가 한국산업은행(KDB) 주도의 국민성장펀드를 통해 AI 스타트업에 연간 30조원을 투입하기로 하면서 정책 자금의 중복 효율성 문제가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소벤처기업부가 구체적인 출자 계획을 확정하지는 않았으나 시장에서는 이미 모태펀드의 역할 축소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이러한 우려는 국회 보고서에서도 지적됐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최근 발간한 '2026년도 예산안 위원회별 분석' 보고서를 통해 국민성장펀드의 투자 대상이 기존 중기부 모태펀드 자펀드와 상당 부분 중복된다며 예산 집행의 비효율성을 언급했다. 보고서는 정부가 AI와 반도체 분야 육성을 강조하고 있으나 이미 모태펀드가 해당 분야에 대한 투자를 진행하고 있어 '옥상옥(屋上屋)' 구조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새로운 펀드를 별도로 조성하기보다 기존 시스템을 활용하는 것이 재정 운용 측면에서 효율적이라는 의미다.


예산 삭감 또한 현실화했다. 벤처업계는 고금리 여파로 얼어붙은 투자 시장 회복을 위해 최소 1조원 이상의 모태펀드 예산 유지가 필요하다고 요구해왔다. 이재명 대통령이 대선 과정에서 벤처 활성화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던 만큼 예산이 1조원을 넘어설 것이란 기대가 모였지만 국회 예산안조정소위원회는 내년도 모태펀드 예산을 당초 정부안인 1조1000억원에서 8200억원으로 약 25% 삭감했다. 삭감의 주된 근거는 모태펀드 자펀드의 미투자 금액인 '드라이파우더'가 충분하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VC 업계는 벤처투자 시장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판단이라는 입장이다. 통상 벤처펀드는 결성 후 3~4년에 걸쳐 분할 투자를 집행하는 것이 글로벌 표준이며 미투자 잔액은 투자가 안 된 잉여 자금이 아니라 적절한 투자처를 찾기 위해 대기 중인 자금이라는 것이다. 이를 단순한 불용 예산으로 간주하여 예산을 줄이는 것은 시장 논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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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정책의 무게추가 국민성장펀드로 쏠리면서 민간 자금을 흡수하는 '블랙홀 현상'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이달 출범을 앞둔 국민성장펀드는 산업은행이 주관하며 10대 첨단 분야에 총 150조원을 투입하는 대형 프로젝트다. 이 펀드는 정부가 원금과 일정 수익률을 보장하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어 연기금과 공제회 등 주요 민간 출자자(LP)들의 자금이 쏠릴 가능성이 크다. 상대적으로 리스크가 높은 벤처펀드로 유입될 자금이 줄어드는 구축 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투자처의 편중과 운용 주체의 전문성 결여도 해결해야 할 과제로 꼽힌다. 150조원에 달하는 자금이 AI 데이터센터나 반도체 클러스터 등 대형 인프라에 집중될 경우 정작 혁신 기술을 보유한 초기 스타트업은 소외되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할 수 있다. 여기에 원금 회수와 리스크 관리를 중시하는 국책은행의 '대출 DNA'가 벤처투자의 본질인 고위험·고수익 성격과 배치된다는 점도 문제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안정성을 좇는 은행의 시각으로 초기 AI 기업의 잠재력을 평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관치 성격이 짙은 자금이 시장을 주도하면 민간 모험자본의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벤처투자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중기부는 확정된 예산 8200억원 중 5500억원을 기업가치 1조원 이상을 목표로 하는 '넥스트 유니콘 프로젝트'에 배정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전체 예산이 줄어들면서 이 계획의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원안을 유지할 경우 가용 예산의 70%가 특정 프로젝트에 묶이게 되어 여타 초기 스타트업 지원 예산은 부족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정부의 정책 기조 변화에 VC 업계의 피로감도 높아지고 있다. 2005년 출범 이후 모태펀드는 민간 자금 유입의 마중물 역할을 하며 국내 벤처 시장을 성장시키는 데 기여해왔다. 하지만 정권 교체나 정책 변화에 따라 모태펀드의 운용 방향이 흔들리면서 벤처투자의 예측 가능성이 저해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 대형 VC사 대표는 "정부가 150조원이라는 규모에 집중하느라 투자 효율성을 놓칠 수 있다"며 "시장에 자금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옥석을 가려낼 전문적인 안목이 필요한 시점인데 검증된 시스템인 모태펀드를 배제하고 관 주도의 거대 펀드 조성에 집중하는 것은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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