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딜사이트 이세정 기자] 현대자동차그룹의 여성 임원 비중이 정의선 회장 체제에서 비약적으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적인 이미지가 강한 자동차 업종 특성상 유독 '유리천장'(여성의 고위직 진출을 가로막은 보이지 않는 장벽)이 견고하다는 이미지를 깨고 있는 것이다.
◆ 현대차·기아·모비스 3사 여성 임원 37명…정 회장, 혁신 드라이브
20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올 1분기 현대차그룹 핵심 3사(현대차·기아·현대모비스)의 여성 임원은 총 37명으로 집계됐다. 3사 합산 임원 수(등기임원+미등기임원)가 775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여성 임원 비중은 4.8%다.
그동안 현대차그룹은 전통적으로 여성 리더들이 약진하기 어려운 기업으로 꼽혀왔다. 현장 근로자 비중이 높은 만큼 조직문화가 수직적인 데다, 여성들의 선호도가 떨어지는 업종이라는 이유에서다. 현대차그룹 오너가의 가풍(家風)이 보수적이라는 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현대차그룹은 오너 3세인 정 회장이 경영 실권을 쥐면서부터 대대적인 변화가 시작됐다. 정 회장은 2019년 3월 현대차·현대모비스 대표이사와 기아 사내이사로 각각 취임하며 본격적인 'ES 시대'를 열었다. 표면적으로 정 회장은 부친인 정몽구 명예회장과 공동 대표이사에 올랐으나, 정 명예회장이 사실상 경영에 관여하지 않으면서 '원톱 체제'가 구축됐다.
정 회장은 그룹사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인적 쇄신을 단행했다. 이른바 'MK(정몽구 약칭)의 남자들'로 불린 부회장단은 순차적으로 용퇴했으며, 젊은 경영진으로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현대차그룹 특유의 순혈주의도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정 회장은 현대차그룹이 단순 완성차 제조사에서 벗어나 '스마트 모빌리티 솔루션 프로바이더'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직군과 무관하게 능력 위주의 인재 발굴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군대식 문화를 버려야만 창의성을 촉진할 수 있는 유연성이 길러진다고 본 것이다.
현대차그룹의 이 같은 기류 변화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는 2023년 말 영입한 김혜인 현대차 HR본부장 부사장이다. 글로벌 인사관리 전문가인 김 부사장은 BAT그룹에서 쌓은 노하우를 살려 현대차그룹의 조직문화를 한층 강화시키라는 특명을 받았다. 특히 정 회장은 HR 담당 임원의 직급을 기존 전무에서 부사장으로 한 단계 격상시키며 능동적인 기업문화 조성에 대한 강한 의지를 공고히 했다.
◆ 현대차, 사상 첫 여성 사내이사 발탁…전체 임원 30% 이상 비중
현대차는 올 3월 말 기준 여성 임원이 총 27명으로 확인됐다. 등기임원은 4명이고, 미등기임원은 23명이다. 정 회장이 현대차 대표에 올랐을 당시 여성 임원이 2명(미등기임원)에 불과했다는 점과 비교하면 약 11배 증가한 숫자다.
현대차 등기임원의 구성 현황은 주목할 만 하다. 자본시장법에 따라 자산총액이 별도기준 2조원 이상인 상장사는 이사회를 특정 성(性)으로만 꾸려서는 안 된다. 해당 법은 2020년 개정됐으며, 2년간의 유예기간을 거쳐 2022년 8월부터 시행됐다. 현대차는 이보다 1년 앞서 이사회에 여성 사외이사를 선임하며 성별 다양성을 확보했다.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사내이사다. 현대차는 1967년 창사 이래 처음으로 올해 3월 여성 사내이사를 발탁했다. 주인공은 진은숙 현대차 ICT 담당 부사장으로, NHN 총괄이사 출신이다. 그가 현대차에 합류한 것은 2021년으로 소위 말하는 '성골'도 아니다. 현대차는 진 부사장의 선임 배경에 대해 "이사회의 기술적 의사결정 역량이 더욱 강조되는 상황이며, 이사회 내 성별·전문분야 다양성을 제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현대차는 여성 사외이사도 3명이나 두고 있다. 그 결과 현대차 등기임원 12명 가운데 여성 비중은 33.3%로 나타났다.
기아 역시 정 회장 체제로 전환된 이후 여성 임원들의 경영 활동이 활발해졌다. 예컨대 정 회장 취임 당시인 2019년 3월 말 기준 기아의 여성 임원은 0명에 그쳤으나, 올 1분기 말 7명으로 증가했다. 등기임원 3명은 모두 사외이사이며, 미등기임원은 4명이다. 같은 기간 현대모비스 여성 임원은 0명에서 3명으로 늘어난 것으로 파악됐으며, 등기임원 1명(사외이사)과 미등기임원 2명이다.
◆ 기존엔 車산업 무관·후방 지원부서…재무·전략·사업 등 영역 확대
독특한 부분은 여성 임원들의 주 전공이 다양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기존에는 여성 임원들의 전문 분야가 마케팅이나 인적관리(HR), 사용자경험(UX) 등 자동차 산업 전문성과 무관하거나 경영지원 부서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재무, 전략투자, 모빌리티, 디자인, 사업부문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실제로 현대차의 경우 김정원 상무는 재무관리실장, 유럽권역재경실장을 거쳐 재경사업부장을 맡고 있다. 카카오와 SK플래닛 출신의 김주리 상무는 전략투자분석담당 임원이다. 사업 부문에서는 이인아 상무가 에너지&수소MI실장을 역임 중이다. 김수영 상무와 이우옥 상무는 각각 모빌리티사업실장, 글로벌LCV&PBV사업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남성 임원의 전유물이던 자동차 디자인 영역에서도 여성 임원들의 활약이 눈에 띈다. 제승아 상무는 현대제네시스디자인이노베이션실장 겸 현대제네시스디자인전략팀장이며, 다이애나 클로스터 상무는 현대CMF팀장이다.
기아는 허현숙 상무가 PSO(부품 제조 공정 승인) 조직에서 업무를 보고 있으며, 현대모비스는 김선희 상무가 법무실을 이끌고 있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모든 임직원이 배경에 상관없이 개개인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환경 조성에 힘쓰고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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