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정동진 기자] 우리나라의 사회적 신뢰는 상대적으로 높은 편에 속한다. 지난 2021년 실시된 한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중 81%는 "문앞에 택배를 두고 가더라도 분실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공장소에서 물건을 깜빡하더라도 대체로 물건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답한 비율 역시 60%를 넘었다.
이 같은 높은 신뢰는 사회적 비용을 낮춘다.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속이거나 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사회에서는 엄격한 통제를 위한 고강도의 감시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뢰의 효용이 사회적 비용의 절감으로 드러나는 셈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도 그의 저서를 통해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신뢰 자본'의 차이"라고 설명했다. 신뢰 기반이 없는 나라는 사회적 비용 증가로 선진국 문턱에서 좌절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최근 국내 기업공개(IPO) 시장의 분위기를 살펴보면 한국의 선진금융은 먼 얘기로 느껴진다. 최근 엄청난 규모의 '불신 비용'을 지불하고 있어서다.
각종 매체에서는 올해 국내 IPO 시장을 '대박', '따따블', '잭팟' 등 각종 자극적인 수사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투자자들 대부분이 신규 성장 기업이 제시하는 밸류에이션과 성장 로드맵을 믿지 않고 있어서다. 단지 누가 물량을 빨리, 더 많이 확보해 수익실현을 하느냐의 싸움이 되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올해 상장한 기업들은 기관 수요예측과 일반 청약에서 수백~수천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하며 높은 관심 속에 데뷔했지만, 상장 이후 주가는 대부분 하락 일변도다. 상장 기업들의 공모가가 책정된 밸류에이션보다 30~50% 낮은 수준인 것을 고려하면 신규 상장 기업의 주가는 공모가보다 높아야 하지만, 이보다 더 하락하는 경우도 상당수다.
하지만 이를 미숙한 시장만을 탓하기는 어렵다. 상장을 주관하는 증권사들 역시 시장 분위기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한 주관사는 "어차피 시장 분위기가 수요예측 상단 이상으로 결정되고 있기 때문에, 밸류에이션을 다소 낮게 조정하는 것을 발행사에 설득하기 쉬웠다"고 이야기했다.
또 다른 증권사 관계자는 투자자들 보호를 위해 삽입되는 풋백 옵션에 대해 "공모에 참여하는 투자자들 중 90% 이상이 상장 직후에 물량을 털기 때문에 부담이 크지 않다"는 식의 대답을 하기도 했다. 건전한 시장 조성에 힘써야하는 주관사의 역할이다. 책임없는 발언이다.
IPO 시장에 대한 불신은 '규제 강화'라는 형태의 비용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해 11월 '파두 쇼크' 이후 상장을 준비중인 기업들에 대해 월 단위 가결산 내역을 제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거래소 역시 상장예심 강화를 공언하며 일명 핀셋 심사를 이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는 결국 '돈맥경화'다. IPO 과정이 엄격하고 길어짐에 따라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스타트업의 고충은 더욱 깊어지고, 이들에 투자한 벤처캐피탈(VC)의 자금 역시 순환되지 않는다. 늘어난 신뢰비용이 산업 전반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결국 돌고 돌아 시장에 부담으로 되돌아온다.
결국 필요한 것은 전반적인 인식의 변화다. 규제로 점철된 당국의 제도 개선만으로는 부족하다. 발행사‧주관사‧투자자 등 모든 시장참여자들이 '신뢰 자본'을 쌓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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