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조은비 기자] LG에너지솔루션이 북미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을 미래 핵심 성장 동력으로 낙점하고 전사적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이번 주력 사업 전환은 전기차(EV) 시장의 일시적 수요 정체(캐즘)를 정면 돌파하는 동시에,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발 전력난과 급변하는 글로벌 안보 지형에 대응해 안정적인 수익 구조를 확보하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전통적인 발전소인 화력이나 원자력을 건설하는 데는 부지 선정부터 주민 반대(NIMBY), 환경 영향 평가 등 복잡한 인허가 절차로 인해 보통 10년 이상의 기간이 소요된다. 반면 ESS는 공장에서 조립된 배터리 컨테이너를 현장에서 연결하는 모듈형 방식 덕분에 1년 내외의 짧은 공기로 전력망에 즉시 투입이 가능하다.
이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를 맞추기 위해 빅테크 기업들이 설치가 압도적으로 빠른 ESS로 눈을 돌리는 배경이다. 현재 OpenAI와 xAI 등 글로벌 AI 기업들이 2030년까지 천문학적인 규모의 데이터센터 건설을 계획함에 따라, 1GW급 GPU 팜(Farm)당 최대 4GWh 수준의 ESS 수요가 비선형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한 에너지 업계 관계자는 "AI 시대의 전력 공급은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보다 얼마나 빨리 전력망에 연결하느냐의 싸움이 됐다"며 "원전이 미래의 해답일 수는 있지만, 당장 내년의 전력난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공사 기간이 10분의1 수준인 ESS뿐"이라고 제언했다.
그동안 LG엔솔이 이 시장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다만 '리소스의 한계'가 발목을 잡았다. 배터리 공장 하나를 짓는 데 수조 원의 자금이 투입되는 상황에서,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줄을 서 있던 EV용 NCM 배터리 주문량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생산 역량이 포화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EV 성장세가 완만해진 틈을 타 LG엔솔은 유휴 설비를 ESS용으로 발 빠르게 전환하며 실익 챙기기에 나섰다.
대외적인 정책 변화도 LG엔솔에 우군이다. 올해부터 시행된 '해외 우려 기관(FEOC)' 규제와 중국산 ESS에 대한 관세 인상 조치는 중국 기업이 장악했던 시장 판도를 뒤흔들고 있다. 특히 미 의회에서 논의 중인 'CHARGE 법안(중국산 ESS 수입 차단 법안)'은 안보 위협을 명분으로 중국산 배터리의 미국 유입을 강력히 규제하고 있다.
여기에 지난 주말 발생한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의 사망과 그에 따른 중동 정세의 극심한 불안은 '에너지 안보'에 대한 목소리를 임계점으로 끌어올렸다. 에너지 수입뿐만 아니라 전력 저장 장치마저 적대적 국가에 의존할 수 없다는 논리가 힘을 얻으며, 중국산 ESS 배터리에 대한 수입 차단 논의가 더욱 구체화되는 양상이다.
이처럼 에너지 안보가 국가 생존과 직결된 과제로 부상하면서, 미국 전력 시장의 요구사항도 변하고 있다. 단순히 '값싼 배터리 셀'을 구매하는 단계를 넘어, '안전한 우방국의 소프트웨어로 시스템 전체를 철저히 통제하는 것'이 핵심 경쟁력이 된 것이다. LG엔솔이 미국 현지 시스템 통합(SI) 법인인 'LG에너지솔루션 버테크(Vertech)'를 전면에 내세워 '에너지 인프라 서비스 기업'으로 진화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존 EV 배터리 계약이 차량 모델 주기에 맞춘 단기성 물량 계약이었던 것과 달리, ESS 인프라 프로젝트는 보통 15년에서 20년에 달하는 초장기 계약이 주를 이룬다. 버테크는 배터리 셀뿐만 아니라 전력 조절 장치(PCS), 제어 소프트웨어, 유지보수(O&M)까지 통합 제공한다. 이는 배터리 셀 가격 변동성에 노출된 제조업의 한계를 넘어, 장기간 안정적인 운영 수익을 확보하는 핵심이다.
LG엔솔은 이미 2025년 5월 미시간 공장에서 미국 내 최초의 대규모 LFP 양산에 돌입했으며, 현재 한화큐셀 등 주요 고객사에 실제 제품을 공급 중이다. 경쟁사인 삼성SDI와 SK온이 2026년 하반기에나 현지 LFP 양산을 계획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최소 1년 이상의 격차를 벌린 셈이다. 당장 'Made in USA' LFP 배터리가 필요한 북미 고객사들에게 LG엔솔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유일한 메이저 파트너로 꼽힌다.
실제 LG엔솔은 올해 신규 수주 목표를 지난해 사상 최대치였던 90GWh 이상으로 설정했으며, 매출 역시 전년 대비 3배 이상 확대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북미 내 ESS 생산 능력을 50GWh 규모로 확충하며 시장 점유율 1위 굳히기에 들어갔다.
다만 '하이니켈 1위'라는 기술적 자존심 대신 저가형 LFP를 택한 데 따른 기회비용은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다. LFP 배터리는 니켈과 코발트 등 고가 금속 함량이 적어 향후 폐배터리 리사이클링 시장에서의 수익성이 낮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의 NCM 라인을 ESS로 전환하는 결정이 2028년경 시작될 초기 EV들의 배터리 교체 수요 대응에 차질을 빚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장의 현금 흐름과 생존을 위해 미래의 특정 시장 기회를 희생하는 선택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지점이다.
한 배터리 업계 전문가는 "LG엔솔의 LFP 전환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지만, 10년 뒤 도래할 대규모 재활용 시장에서의 주도권 약화라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며 "결국 고사양 NCM의 기술력을 ESS의 신뢰성과 어떻게 결합해 프리미엄 ESS 시장을 창출하느냐가 장기적 성패를 가를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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