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김규희 기자] 150조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가 본격적인 시동을 건 가운데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을 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1호 투자처' 타이틀을 놓고 물밑에서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다. SK하이닉스가 사상 처음으로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을 앞지르며 반도체 지형도를 뒤흔든 것이 이번 경쟁의 도화선이 됐다. 'K-엔비디아'를 자처하며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을 장악한 SK의 질주는 삼성의 자존심에 깊은 생채기를 냈다. 삼성 입장에서는 국민성장펀드의 반도체 부문 첫 수혜처마저 SK에 내줄 경우 삼성의 브랜드 가치와 상징성에 가해질 타격이 상당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2일 투자은행(IB), 재계 등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핵심 관계자들은 최근 펀드 주무 부처인 금융위원회와 한국산업은행을 잇따라 방문하며 지원 당위성을 피력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글로벌 AI 반도체 패권 경쟁이 시시각각 격화되는 상황에서 자체 자금만으로는 시장 선점을 위한 '골든타임'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절박함을 호소하기 위해서다. 특히 국민성장펀드가 제공하는 대규모 장기 저리 자금은 단순한 유동성 공급을 넘어 정부가 보증하는 미래 핵심 사업이라는 상징성을 갖는 만큼, 양측 모두 '반도체 1호' 투자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다는 후문이다.
삼성전자는 평택캠퍼스 5공장(P5) 건설 자금으로 총 2조5000억원의 지원을 제안받은 상태다. 산업은행이 펀드 내 첨단전략산업기금을 활용해 2조원을 제공하고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시중은행이 각각 1000억원씩 총 5000억원의 선순위 신디케이트론을 얹어주는 구조다. 삼성은 이 자금을 HBM 주도권 탈환을 위한 6세대 HBM(HBM4) 및 10나노급 차세대 DRAM 생산 설비 확충에 투입하여 기술 초격차를 회복하겠다는 구상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SK하이닉스는 '영업이익 역전'이라는 사상 초유의 기록을 앞세워 기선제압에 나섰다. 2025년 연간 실적 발표 결과 SK하이닉스는 영업이익 47조2000억원을 기록하며 삼성전자(43조5000억원)를 처음으로 제치고 국내 기업 영업이익 1위에 올랐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이를 발판 삼아 시가총액 2000조원 목표를 내세우며 SK하이닉스를 AI 인프라 기업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SK는 미국 실리콘밸리에 설립할 AI 투자 전담 법인 'AI 컴퍼니(가칭)'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인프라 구축을 명분으로 국민성장펀드의 마중물을 요청하고 있다.
자금 지원은 반도체‧디스플레이 분과 투자심의위원회를 거쳐 기금운용심의회를 통해 확정될 예정이지만 심사 과정에서 민간 공동위원장인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과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 등의 영향력이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금융권에서는 박 회장과 삼성 사이의 미묘한 기류에 주목하고 있다. 박 회장은 '미래에셋 3.0'의 핵심 동력으로 스테이블코인을 점찍고 이를 위해 네이버와 10년 가까이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으며 네이버파이낸셜 등에 공을 들여왔다. 가상자산이 실물 경제의 결제 수단으로 자리 잡는 디지털 자산운용사로의 도약은 그의 오랜 숙원이었다.
그러나 최근 네이버가 미래에셋이 아닌 두나무와 손을 잡으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여기에 삼성생명, 삼성증권 등 삼성그룹 금융 계열사가 두나무 지분 매입을 검토하고 있다. 삼성이 자금력과 단말기 시장 지배력을 앞세워 미래에셋이 선점하려던 디지털 금융 생태계의 주도권을 사실상 가로챘다는 평가가 나온다. 10년 가까이 공들여온 디지털 자산운용사로의 꿈이 삼성의 가세로 위협받게 된 셈이다. 금융권 일각에서 박 회장의 이러한 심리적 기제가 삼성전자 지원 심사 과정에서 미묘한 '바이어스'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민성장펀드는 민관 합동으로 150조원을 조성해 첨단전략산업 생태계 전반을 지원하는 프로젝트다. 직접투자 15조원과 간접투자 35조원 외에도 50조원 규모의 저리 대출을 통해 시설 자금과 R&D 투자를 뒷받침한다. 국민성장펀드는 분야별로 AI에 30조원, 반도체 20조9000억원, 모빌리티 15조4000억원, 바이오·백신에 11조6000억 원을 지원할 방침이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1호 투자처 선정은 단순히 자금을 공급하는 행위를 넘어 국가가 공인한 미래 성장 엔진이라는 상징적 훈장"이라며 "영업이익 역전으로 자존심을 구긴 삼성이 대규모 지원 패키지마저 SK에 기세를 뺏긴다면 내부적인 상처가 가늠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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