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최유라 기자] "공정위가 소설을 쓴 것은 아니겠죠."
인쇄용지 제조·판매 사업자 6개사(무림에스피·무림페이퍼·무림피앤피·한국제지·한솔제지·홍원제지)의 담합 행위 제재를 두고 나온 업계 관계자의 말이다.
통상 공정거래위원회의 담합 조사 결과가 발표되면 산업계에선 억울함부터 토로한다. "산업 특성을 반영하지 못했다"거나 "시장 상황상 불가피했다"는 항변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다르다. 3383억원 규모 과징금 부과에도 업계는 이렇다 할 반박 대신 침묵하거나 수용하는 기류를 보이고 있다.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관계가 깔려 있다는 방증이다.
사실 이번 사안은 '관행'이나 '산업 특성'이라는 말로 덮기엔 지나치게 노골적이다. 주사위를 던져 가격 인상 통보 순서를 정하고, 공중전화와 식당 전화, 타 부서 직원의 휴대전화까지 동원해 연락을 주고받은 정황은 상식을 벗어난다. 각사가 "상황을 엄중하게 받아들인다"며 사과문을 발표하며 고개를 숙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 업체는 관련자에 대한 내부 중징계를 조치했으나 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싸늘하다. 3년10개월(2021년 2월~2024년 12월)간 조직적으로 이뤄진 담합을 '실무진 일탈'로 규정하고 있어서다. 이는 사태의 본질을 축소하려고 '꼬리 자르기'에 나섰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시장 점유율 80% 이상을 차지한 사업자들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 상황을 두고, 경영진의 인지나 최소한의 가이드라인 없이 가능했겠느냐는 의문도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실무자에게만 책임을 물어 사태를 덮으려는 면피용 조치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지금의 인쇄용지 산업은 시장의 관심에서 한 발 비껴나 있다. 한때 30여년 동안 국내총생산(GDP) 대비 높은 성장률을 구가했으나 이제는 더 이상 과거의 영광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럴수록 시장 신뢰는 더 중요한 자산이 된다.
그런데 이번 사건은 그 신뢰의 기반을 흔들었다. 이제는 소비자들도 종잇값이 주사위 숫자에 의해 결정됐다는 사실을 안다. 이번 사태로 소비자까지 피해를 입으면서 생산활동과 문화생활에 필요한 소재산업으로서의 역할마저 외면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업체들의 사과가 진심이라면 단순히 과징금을 내고 관련자를 징계하는 것으로 끝낼 일은 아니다. 재발을 막기 위한 내부 통제는 무엇인지에 대한 답이 우선이어야 한다. 신뢰를 저버린 대가는 3383억원의 과징금보다 훨씬 무거운 소비자의 외면으로 돌아올 수 있음을 뼈저리게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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