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노우진 기자] 가시권에 들어온 코스피 5000 시대의 본질적인 배경에는 글로벌 경쟁력을 갖춰낸 한국 대표 기업들의 실적 개선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이 반도체와 조선, 전력설비 등 주요 산업군에서 공급자 우위의 시장 환경을 누리면서 이익을 확대하자 밸류에이션 부담이 완화됐고 투자자들의 지속적인 러브콜을 받고 있다는 분석이다. 최근에는 외국인과 기관투자가의 쌍끌이 매매가 이뤄지는 가운데 미국 증시로 떠났던 개인 투자자들까지 시장 상승을 뒷받침하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15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최근 증시 랠리는 과거처럼 투자 심리에 의존한 단기적인 상승이 아니라 이익 전망 상향이 주도하는 대세상승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코스피 영업이익 전망치는 지난해 9월 초 300조원대 초반에서 최근 400조원대 초반으로 100조원이 상향 조정됐다. 반도체와 조선에 최근에는 전력망 밸류체인에 속한 원전과 전선, 변압기 등 중전시 기업들까지 수익성 개선 전망이 확실해지면서 시장 상승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평가다.
시장에서는 실적 개선 흐름을 핵심 변수로 보고 있다. 한지영 키움증권 연구원은 "연초 기준 코스피 올해 영업이익 컨센서스가 427조원에서 473조원으로 10.8% 상향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익 증가 속도가 지수 상승률을 웃돌고 있다는 점에서 실적 모멘텀이 랠리를 설명한다"고 분석했다. 정해창 대신증권 연구원은 "유동성에 기대는 장세가 아니라 펀더멘털이 주도하는 상승"이라고 평가했다. 김중원 현대차증권 연구원도 "이익 개선이 지수 레벨을 끌어올리는 구조가 형성됐다"고 진단했다.
◆ 슈퍼사이클에 올라탄 반도체
시장 상승의 최중심에는 반도체 업종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인공지능(AI) 서버 수요가 확대되면서 메모리반도체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다는 설명이다. 추론 모델이 고도화될수록 데이터 처리량이 증가하고, 이 과정에서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가 집중되고 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도 최근 메모리반도체 공급 부족 상황을 언급했다.
가격 지표에서도 공급자 우위 구조가 확인된다.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PC용 D램 범용 제품의 평균 고정거래가격은 전월 대비 14.81% 상승한 9.3달러를 기록했다. 조사 시작 이후 처음으로 9달러를 넘어섰다. 메모리카드·USB용 낸드플래시 범용 제품 가격 역시 같은 기간 10.56% 오른 5.74달러로 집계됐다. JP모간은 메모리 업황 호황이 10분기 이상 이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수요 증가는 실적 개선으로 직결되고 있다. 반도체 산업은 고정비 비중이 높은 구조다. 매출이 늘어나면 이익률이 빠르게 개선되는 특성이 있다. SK하이닉스 역시 매출 확대 과정에서 원가 부담이 크게 늘지 않으면서 수익성이 개선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IB 업계 관계자는 "업황이 타이트한 국면에서는 반도체 기업의 실적 레버리지가 크게 확대된다"고 말했다.
AI 관련 수요 증가가 이어지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대한 실적 기대치도 높아졌다.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 증권사들도 이익 전망을 상향하고 있다. 모건스탠리는 지난해 말 보고서에서 삼성전자가 올해 DS부문에서 94조6250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할 수 있다고 추정했다. 노무라증권은 SK하이닉스의 올해 영업이익 전망치를 99조원으로 제시했다. 양사의 연간 영업이익 합산 규모가 200조원에 근접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 수주산업도 공급자 우위 구조
중국과 가격경쟁을 벌이던 조선업종에서도 공급자 우위 구조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조선소의 건조 슬롯이 대부분 채워지면서 선별 수주가 가능한 환경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외형 확대보다 수익성 중심의 수주 전략을 취할 수 있는 여건이다. 조선사들의 수주잔고는 사상 최대 수준에 근접해 있다. 평균 3년치 일감이 확보된 상태다. 신규 발주가 이어지면서 수주잔고도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미중 패권분쟁으로 인해 중국 조선사들에 대한 서방 동맹들의 발주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도 반사이익을 높이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고선가·고부가 선박 수요가 확대되는 점은 업종 자체에 우호적이다.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초대형 컨테이너선, 친환경 연료 추진선 등 고가 선박 발주가 늘고 있다. LNG 운반선은 미국을 중심으로 수출 프로젝트가 본격화되면서 중장기 발주 증가 가능성이 제기된다. IB 관계자는 "조선사 실사를 진행하면 할수록 수익성 변화가 과거와 확연히 다르다는 평가가 나온다"며 "구조적으로 수익성이 낮았던 산업이지만 최근에는 두 자릿수 영업이익률을 기대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전력설비 업종도 AI 확산의 수혜를 받고 있다. 고성능 데이터센터는 AI 인프라의 핵심이다. 기술 고도화 과정에서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량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글로벌 빅테크들이 전력 인프라 투자를 확대하는 배경이다. 전 세계 전력망 투자 확대에 따라 전력설비 기업들의 수주가 늘고 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수주 환경은 양호하다는 평가다. LS일렉트릭, HD현대일렉트릭, 대한전선 등은 연초부터 신규 공급 계약과 프로젝트를 확보하면서 실적 기대를 키우고 있다.
다만 실적 개선이 일부 업종에 집중됐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제외하면 코스피 전체 영업이익 증가 폭은 크지 않다. 특정 섹터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외부 충격에 따른 변동성도 커질 수밖에 없다. 코스피 5000 안착을 위해서는 주도 업종의 강세에 더해 소외 업종의 실적 회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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