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을 앞두고 삼성과 SK, LG, 현대차 등 4대 그룹이 내년 사업 전략 수립에 나섰다. '인공지능(AI) 슈퍼사이클'이 가속화하면서 한국이 강점을 지닌 반도체·배터리·자동차 등 주요 산업의 지형이 크게 재편될 전망이다. 4대 그룹의 연말 인사도 예년보다 앞당겨 진행되는 모습이다. 변화의 속도가 빨라진 만큼 그룹 총수들의 결단력과 추진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딜사이트는 기획 시리즈 '4대그룹 내년 사업점검'을 통해 삼성, SK, LG, 현대차 등 주요 그룹이 구상하는 내년 경영 전략과 핵심 과제를 차례로 짚어본다. <편집자주>
[딜사이트 이세연 기자]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 전략의 윤곽을 잡았다. 앞서 HBM3E 12단에 이어 내년에는 HBM4 12단까지 엔비디아 공급망에 진입하는 게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면서 '내실 다지기'에 집중하는 그림이다. HBM4는 수율 안정화에 주력하고 있고, HBM3E는 엔비디아 외 빅테크 출하를 확대해 수익 기반을 다지고 있다. 이와 함께 범용 D램과 낸드플래시는 고부가가치 제품 위주의 '선택과 집중' 전략을 유지하고, 파운드리는 2나노 이하 선단 공정을 중심으로 사업 안정화를 모색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내년 메모리 업계의 'HBM4 전환기'에 안정적으로 대응하고자 수율 올리기에 집중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HBM4는 코어 다이에 1c D램, 로직 다이에 4나노(nm) 파운드리 공정을 적용해 제작된다. 현재로서는 1c D램의 수율이 안정화되지 않아, HBM4 사업에서 높은 수익성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온다. 최근 내부 연구개발(R&D) 팹에서 진행한 웨이퍼 테스트 결과 1c D램의 수율은 DDR5 기준 70%, HBM4 기준 50%까지 상승한 것으로 파악된다.
양산 체제를 구축하려면 HBM4 기준 최소 70% 이상의 수율이 확보돼야 한다. 삼성전자는 당장 내년 초 HBM4를 양산 이관하는 것을 목표로 잡고 있어 수율 개선이 시급한 상황이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현재(50%) 수준의 수율을 양산 단계까지 유지한다고 낙관적으로 가정해도 손익분기점(BEP) 수준에 그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조차 삼성전자가 SK하이닉스처럼 HBM4에서 '제값'을 받는다는 가정이 전제돼야 가능한 이야기다. SK하이닉스는 지난 3분기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에서 "내년도 HBM 공급 가격은 현재의 수익성이 유지될 수 있는 수준에서 형성됐다"고 공식화한 바 있다. SK하이닉스는 TSMC에 HBM4 베이스 다이 생산을 맡기고 있어, 총 원가가 전작인 HBM3E보다 30%가량 높다. 하지만 엔비디아로부터 이와 유사한 수준의 가격 프리미엄을 확보해 원가 부담을 상쇄하게 된 것이다.
삼성전자는 우선 이달 중 HBM4 커스터머(CS) 샘플의 내부 성능 테스트(PRA)를 끝내고 엔비디아에 전달할 계획이다. 엔비디아의 HBM4 수요가 워낙 강한 만큼 구체적인 물량 계약 또한 연말 내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야 삼성전자가 생산 물량을 조기에 확정해 웨이퍼 투입을 시작할 수 있어서다.
앞선 관계자는 "만일 삼성전자가 이번에 엔비디아의 눈높이를 충족하지 못할 경우, 엔비디아가 (삼성전자에 배정하려던 물량을 두고) SK하이닉스와 추가 계약을 체결할 가능성도 존재한다"며 "이렇게 되면 SK하이닉스가 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맺어 수익성을 더욱 끌어올릴 수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의 이번 HBM4 최종 샘플 납품 결과에 이목이 쏠리는 이유다.
반면 웨이퍼 기준 수율 70%를 달성한 HBM3E 12단의 경우 상황이 다르다. HBM4는 아직 양산 체제가 구축되지 않아 엔비디아도 삼성전자가 준비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고 있지만, HBM3E는 본격적인 공급이 시작된 상태다. 현 시점에서 삼성전자의 HBM3E는 SK하이닉스 제품보다 약 30%가량 저렴해 가격 경쟁력에서도 우위를 갖는다.
반도체 업계 다른 관계자는 "그동안 삼성전자의 엔비디아 HBM3E 퀄테스트가 오랜 기간 지연됐던 이유는, 샘플별로 기준치를 미달할 때마다 3개월씩 재검증을 진행했기 때문"이라며 "그러다 지난달에야 주문을 받게 됐다. 퀄테스트를 통과했다고 별도의 승인서를 받는 개념이 아니라, 양산 체계가 갖춰지고 고객사의 주문이 발생하면 자연스럽게 공급이 이뤄지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삼성전자가 엔비디아에 납품하는 HBM3E 물량이 많지 않아, 다른 빅테크 고객사로 매출을 확대하는 것이 과제로 꼽힌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 물량 만으로도 캐파(생산 능력)가 포화 상태라 나머지 수요가 삼성전자로 쏠릴 가능성이 높다. 특히 삼성전자와 견고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브로드컴과 AMD 매출을 늘릴 필요가 있다. 업계에 따르면 올해 기준 HBM3·HBM3E 시장에서 엔비디아의 수요 비중은 약 74%, 브로드컴과 AMD는 각각 19%, 7% 수준이다.
삼성전자는 내년 범용 D램 사업에서는 '선택과 집중' 전략을 강화한다. LPDDR5X, DDR5, GDDR7 등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으로 판매를 확대하되 1c 공정은 적용하지 않기로 했다. 1c D램은 전량 HBM4 생산에 투입한다는 방침이다. 이는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의 행보와는 차별화된 전략이다. 두 회사는 현재 HBM4에서는 안정성을 고려해 1b 공정을 유지하고, 범용 D램 부문에는 1c 공정을 점진적으로 확대 적용하고 있다.
낸드플래시의 경우 과거 경영진의 '오판'을 바로잡는 방향으로 체질 개선에 들어간 모습이다. 낸드 시장 점유율 1위 업체인 삼성전자는 그동안 트리플레벨셀(TLC) SSD 제품에 집중하면서 쿼드레벨셀(QLC) eSSD 시장의 초기 상승 흐름에 올라타지 못했다. 하지만 내년부터는 286단 V9 낸드의 램프업(가동률 확대)을 기점으로 QLC 비중을 적극 확대할 계획이다.
다만 낸드 캐파 증설에는 여전히 보수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앞선 관계자는 "과거 삼성전자는 고객사의 무리한 낸드 증설 요구를 받아들였다가, 정작 그만큼의 구매가 뒤따르지 않아 공급 과잉이 불거지고 가격이 급락하는 상황을 많이 겪어왔다"며 "이러한 경험 탓에 최근 낸드 가격 반등으로 업계의 기대감이 높아졌음에도 삼성전자는 여전히 신중한 기조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 역시 2나노(㎚·10억분의 1m) 공정 포트폴리오를 확장하며 실적 개선의 터닝포인트를 찾고 있다. 지난 1·2분기 각각 2조원대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던 시스템LSI·파운드리 부문은 올 3분기 들어 약 1조원 수준으로 손실 폭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2나노 공정의 성과는 제한적이었고, 대부분 4~8나노 공정의 가동률이 높아지며 고정비 부담이 완화된 데서 비롯됐다. 여기에 지난 7월 테슬라로부터 22조원 규모의 AI6 칩 위탁생산 계약을 따내며 약 1조원가량의 개발비를 확보한 것도 일부 힘을 보탰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그간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는 ▲3나노 이하 초미세공정에서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 사용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공정 등 '세계 최초' 타이틀을 홍보해왔지만 정작 검증이 이뤄지지 않아 고객사 이탈이 이어졌다"며 "최근에는 수율 안정화에 집중하며 반등의 발판을 모색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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