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양행이 내년 창립 100주년을 맞이한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유한양행은 단순히 좋은 의약품을 만드는 것을 넘어 기업의 사회 환원 등 시대를 앞서가는 '유일한 정신'을 실천하며 한국 기업들의 귀감이 됐다. 또 끊임없는 연구개발(R&D)을 통해 '렉라자' 등의 혁신적인 성과를 내며 '글로벌 톱(TOP) 50 제약사'로의 도약이라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유한양행 100년의 발자취를 되짚어 보고 창업 정신을 계승해 미래 100년을 준비하는 도전과 혁신을 집중 조명해본다. [편집자주]
[딜사이트 방태식 기자] '100년 기업', '국내 제약사 매출 1위', '전통제약사 최초 연매출 2조원 달성'
모두 유한양행을 상징하는 수식어들이다. 그러나 지금의 성취는 결코 순탄한 길 위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국가적 재난의 한복판에서도 유한양행이 국가대표 제약사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창업주 유일한 박사의 리더십이 있었다.
유한양행은 1926년 유일한 박사가 설립했다. 유 박사는 미국 미시간 대학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뒤 일본 자본이 장악한 국내 제약 시장에 '우리 손으로 만든 약'을 보급하겠다는 뜻으로 회사를 세웠다. 그는 미국에서 숙주나물 통조림 사업을 통해 모은 자금으로 의약품을 수입해 국내에 공급했다. 당시 유한양행은 일제의 세금 탄압 등 압력에도 항생제 및 소염제, 해열제 등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외세 의존도가 높던 제약산업에서 자립의 첫걸음을 내디든 셈이다.
유 박사는 기업가인 동시에 독립운동가였다. 대표적으로 그는 1940년대 미국 체류 시절 '냅코 프로젝트(NAPKO Project)'에 참여했다. 냅코 프로젝트는 미육군 전략처(OSS)가 일본을 대상으로 진행한 비밀첩보작전으로 한인 19명으로 구성된 특수부대가 무기 사용, 낙하산 훈련 등 고강도 군사훈련을 받고 한반도 침투를 준비한 극비 작전이었다. 당시 유 박사는 50세의 나이로 1조 조장으로 작전에 참여하였는데 사후에 그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광복 이후 유한양행은 또 다른 위기를 맞이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서울 본사 및 소사공장을 뒤로한 채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기 때문이다. 당시 유한양행은 부산에서 동상약과 포도당 주사액 등을 생산하며 군에 납품했다. 또 전시 상황에서도 기초 의약품을 공급하며 국민 보건을 지켰으며 전후 폐허 속에서도 공장 가동을 재개하며 국토 재건의 초석을 놓았다.
아울러 유 박사는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사재를 들여 1953년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11회 졸업생까지 전액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실무형 기술인력 양성에 주력했다. 해당 사례는 유한양행의 '교육을 통한 사회 환원' 철학의 출발점으로 알려졌다.
유한양행은 한국 기업사에도 깊은 족적을 남겼다. 회사는 1962년 제약업계 최초로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하며 투명경영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어 1969년에는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했는데 한국 기업문화의 새로운 전환점을 열었다는 업계 시각이다.
그 외에 유한양행은 창립 초기부터 성실한 납세도 이어오고 있다. 박정희 정권 당시 정부가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수차례 진행했지만 단 한 건의 탈세나 비리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일화는 지금도 회자된다. 업계에서는 유 박사가 강조한 '정직과 신용'의 원칙이 조직 문화로 뿌리내려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유한양행은 제약을 넘어 바이오·디지털헬스 등 미래 산업으로 외연을 확장하며 새로운 100년의 항해를 준비하고 있다. 회사는 창립 100주년을 앞두고 '글로벌 톱 50 제약사' 진입을 목표로 설정했다. 유 박사가 일제강점기 속에서 세운 '국산 의약품의 꿈'은 이제 세계무대에서 이어질 전망이다.
유한양행 관계자는 "유한양행은 가장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게 이바지하자는 유일한 박사님의 창업정신을 모든 기업활동에 반영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으로써 애국애족의 창업정신과 혁신신약 개발을 통해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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