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배지원 기자] 이재명 정부 출범 전후로 주주보호 차원에서 자본시장 규제가 강화하자 교환사채(EB) 발행이 기업 자금조달 수단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상법 개정으로 자사주 활용이 이전처럼 자유롭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조달선이 막히기 전에 이른바 '막차'를 타려는 기업들의 행렬이 늘어나는 것이다. 증권사들도 자사주 비중이 높은 기업을 타깃으로 발행을 제안하며 시장을 키우고 있다.
8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올해 EB 발행 규모는 3분기 말 기준 2조375억원으로 집계돼 지난해 전체(9863억원)의 두 배를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하반기에 예상되는 최소 1조~2조원 이상의 잠재 물량을 고려하면 EB 시장은 전년비 3~4배로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부에선 새 대통령과 급진적인 여당 정부가 기업의 자본시장 조달선을 유상증자 등 정통코스가 아니라 메자닌 혼성증권 시장으로 직간접 몰아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우선 EB는 회사채의 일종으로 일정 조건 하에서 채권을 특정 기업의 주식(대개 자사주나 계열사 주식)으로 교환할 수 있는 권리가 붙은 형태로 발행하는 증권이다. 즉 EB는 민간기업이 발행하는 옵션부 회사채라고 정의할 수 있다. EB는 상법 제513조(전환사채) 및 유사 규정에 근거해 발행되지만 전환사채(Convertible Bond, CB)와 달리 발행사 신주로 전환되는 게 아니라, 미리 보유한 다른 회사(또는 자기주식)와 교환되는 구조다. 이 때문에 EB는 CB나 신주인수권부사채(BW)와 함께 주식연계증권(Equity-linked Bond) 으로 분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EB는 채권보다 이자 측면에서 낮은 쿠폰 또는 무이자로 발행되는 경우가 많다. 투자자들에게 주식 전환이나 교환 옵션이라는 기대 수익 요소를 줄 수 있기 때문으로 발행사 입장에선 이자비용을 낮출 이점이 있다. 한마디로 채권보다 발행 비용이 싸다는 얘기다. 예컨대 국가신용도를 바탕으로 발행하는 한전채나 한국산업은행 채권 등에 비해서도 EB 금리가 낮은 경우가 많다. 실제 한국장학재단 특수채 17-2의 표면금리는 2.23%였지만 한국카본이 발행한 EB의 이자율은 0%였다. 자사주를 통한 EB 발행의 메커니즘은 회사가 보유한 자사주를 교환대상(기초자산)으로 묶어 EB를 찍으면, 외부 투자자에 그 자사주를 넘겨 현금화할 수 있고(채권이 주식으로 교환될 때), 이는 즉시 신주 발행 없이도 자금을 조달하는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EB 시장이 커진 이유는 최근 상법 개정안에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국회 발안을 통해 속속 추진되면서 기업들이 늘어난 자사주를 계륵이 되기 전에 활용하려는 수요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미 보유한 자사주를 주주이익을 위해 소각하는 대신 일단 교환사채를 발행해 그만큼의 자금을 조달하고 자사주는 나중에 그 상환대가로 미리 처분하려는 속내다. 그럼 애써 모은 자사주를 경영진 입장에서는 무용지물로 태우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시장은 이를 단순한 자금조달선이 아닌 제도 변화 전에 경영권 재량을 전횡하는 막차 전략 꼼수로 해석한다.
국내 증권사들은 이 틈을 파고들어 EB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고금리 환경과 제한된 유상증자 규제 기조 속에서 IB하우스들이 자사주를 많이 보유한 기업에 먼저 EB 발행을 제안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IB 관계자는 "최근 급증한 신종자본증권이나 주식수익스왑(PRS) 계약 거래는 일반적으로 조달에 어려움이 있는 기업이 먼저 제안하는 경우가 많다"며 "그러나 EB는 현재 증권사들이 자사주 비중 높은 기업을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마케팅에 나서는 사례가 대부분"이라고 밝혔다.
업계에선 오너가 의사결정을 신속히 내릴 수 있는 기업에서 EB 발행이 성사되기 쉽다고 보고 있다. 상법 개정안 통과 전에 자사주를 활용한 EB 발행은 자칫 '꼼수'로 비칠 수 있어 부담이 적지 않다. 현 정부가 코스피5000 달성을 목표로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밀어붙이고 있어서다. 이런 부담감 속에 EB를 찍으려면 오너의 결단 여부가 발행 성사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최근 EB 발행을 추진한 태광산업과 SK케미칼, 리파인, 대원제약 등이 이런 사례로 지목된다. 자사주 활용을 둘러싼 논란에도 불구하고 짧은 기간에 발행 결정 결론을 내린 것은 그만큼 오너 결단이 신속하게 이뤄진 결과라는 해석이다. 최근 KCC는 EB 발행을 추진했다가 주주의 반발로 철회했는데, 이 과정에서도 정몽진 회장을 둘러싼 잡음이 발행이나 취소 과정에서 주요하게 작용했다는 지적이다.
일부 최고 경영자들은 상법 개정안의 최종 통과 여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고 있다. 일부 최고경영자는 '소각당할 때까지, 소각된 것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미리 나서서 기업의 꽃놀이패인 자사주를 유통주식으로 바꿀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자본시장법이나 상법 개정안 중 일부 법안은 시장 타격이나, 증시 상황에 따라 유예되거나 번복되는 경우도 많아서다. 법안 통과 가능성에 대한 셈법도 기업마다 다른 상황이다.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 EB 발행은 신주가 아니라 보유한 자사주를 기초로 하기에 단기간 내에 주주가치 희석을 발생시키지 않고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매력적이다. 물론 장기적으로 주식이 교환되면 주주구성 변화가 발생하고 희석 가능성도 높아지지만 일단은 현 경영진 임기 내에 메리트가 높다는 의미다. 특히 표면 및 만기 이자율을 0%로 발행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매우 저렴한 조달 수단이다. 현금 이자부담을 크게 낮출 수 있다는 의미다.
자산운용사나 증권사 등 EB 투자가 입장에서도 교환대상인 자사주의 주가상승시 교환 프리미엄을 노릴 수 있다. 일부 적극적인 운용사들은 EB 투자와 동시에 기초주식을 공매도(혹은 헤지)해 수익을 창출하는 차익거래 전략을 쓰고 있다. EB 투자가는 낮은(또는 0%) 쿠폰과 주가상승시 상방(옵션) 보유라는 구조적 매력을 보고 EB를 매수한다는 것이다.
EB는 게다가 발행사 입장에서 단순 차입금보다 만기나 교환조건을 다양하게 설계할 수 있어 인수합병(M&A) 운영자금, 재무구조 조정 등 용도에 따라 유연하게 활용할 수단이 된다. 특히 재무 건전성 측면에서 단기 차입이 부담스러운 경우에도 상대적으로 조건을 맞춰 조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일부 기업들은 EB를 통해 경영권 방어(혹은 경영권 관리) 목적으로 자사주를 묶어두는 식의 전략적 활용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발행사와 경영진 입장에서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사주를 기초로 한 EB는 소액주주와 시장의 적잖은 반발을 불러오고 있다. 코스피 5000을 바라는 투자가들과 새 정부 입장에선 자사주 소각을 회피하거나 주주가치를 실질적으로 훼손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구조적 특성 때문이다. 실제로 오너 경영 유지만을 위해 그동안 자사주를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모아온 기업들 입장에서는 모든 주주들에 동등한 가치로 증대된 소각 의무는 날벼락이 아닐 수 없다. 태광산업이나 광동제약 등 일부 상장 제약사들이 자사주 활용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EB는 발행사 입장에서는 이득이 많지만 소액주주 입장에서는 주주가치를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설계로 치우칠 가능성이 높다는 문제도 시장 확대를 긍정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게 하는 요인이다. 일단 관계자들은 자사주의 헐값 처분이 문제가 된다고 지적한다 자사주를 기초자산으로 EB를 찍어 외부에 넘기면 실제론 회사가 보유한 주식을 시가보다 낮은 가격(PBR 등 저평가 상태)으로 처분하는 결과가 초래된다는 지적이다. 특히 교환조건이 발행사에 유리하게 설계될 경우 기존 주주들의 지분가치는 희석될 수밖에 없다. 자사주 소각 대신 발행되는 EB는 소액 주주들에게 약속된 주당이익(EPS) 개선을 막아 주주환원에는 큰 장애가 된다.
EB를 발행하면서 어떤 자사주를, 어떤 가격·시점에 교환 가능한지 기초자산에 대한 실제 처분 흐름을 이해하기 어렵게 설계하면 소액주주로서는 대응이 어려운 문제도 발생한다. 이른바 정보 비대칭 문제의 심화다. 특히 경영진 입장에서는 EB를 통해 단기간·단절적인 거래로 우호세력(친족·특정 펀드)에 지분을 이전하는 전략이 가능하다. 교환시점을 4주 내로 짧게 설정하거나 우호 매수자와 사전조율할 경우 경영권·지배구조 목적으로 자사주를 넘겨 모럴 헤저드 가능성이 있는 현 오너의 우호지분 확보에 쓰는 문제다. 태광산업이 보유 자사주 전량(약 24.4%)을 기초로 3000억원이 넘는 EB 발행을 결의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문제가 됐다. 태광산업 2대주주인 트러스톤자산운용 등은 이에 대해 저가 처분이면서 경영권 승계 편법이라고 법원에 발행금지 가처분을 청구했지만, 이에 대해 법원은 경영판단을 존중한다는 기각 결정을 내렸고 논란은 증폭되고 있다.
금융당국은 이런 문제를 인식해 지난해 말 시행령 개정을 통해 자사주 관련 제도의 법적 장치를 보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공시·제도 개선을 추진하는 분위기 자체가 EB 발행 급증의 촉매 역할을 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당국은 EB 공시 세부규정을 강화하거나 교환조건 투명화 의무 등을 부과하려는 추가적 규제를 준비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대부분 증권사에서 자사주 비중이 큰 기업에 EB 발행을 활발하게 마케팅하고 있다"며 "제안하는 건수에 비하면 실제 실행까지 이어지는 딜은 적은 수준"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눈으로 시장을 바라봅니다. 딜사이트 무단전재 배포금지
Ho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