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배지원 차장] 상법 개정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한국 기업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 가능성이 높아지자, 그동안 금고에 넣어두었던 자사주를 교환사채(EB) 기초자산으로 활용하는 기업들이 급증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합법적인 자금 조달 수단이지만, 들여다보면 이미 상법 1차 개정안에 반영된 '주주충실의무'는 여전히 실종된 모습이 역력하다.
KCC의 사례는 시사적이다. 삼성물산 지분을 3조4000억원어치나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활용하지 않고 자사주를 EB의 기초자산으로 선택했다. 자사주가 교환되는 순간 의결권이 복원돼 기존 주주 지분가치가 줄어들 수 있고, 유통주식수가 늘어나 주가가 떨어질 가능성도 있다. 결국 주주 반발로 백기를 들었지만, 주주의 이익을 고려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촌극이었다.
SKC의 경우는 더 노골적으로 일반주주를 배제시켰다. 자사주를 기초로 한 EB를 발행하면서 핵심 자회사인 SK넥실리스와 앱솔릭스(Absolics)를 상장하지 않는 조건을 내걸었다. 재무적 투자자(FI)인 한투PE와 도미누스PE의 주식 가치가 떨어지지 않도록, 향후 3년 이내에는 이들 자회사 IPO(기업공개)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알짜 자회사의 상장으로 얻을 수 있는 일반 주주의 가치제고 기회는 막아뒀다.
현 정부는 출범 이후 일관되게 주주가치 제고와 환원 확대를 강조해왔다. 증시 체질개선 의지를 밝히고,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포함한 상법 개정을 예고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업의 이익이 소수 지배주주가 아닌 전체 주주에게 골고루 돌아가도록 하겠다는 명확한 정책 방향이었다.
자사주 기반의 EB 발생 러시는 이러한 정책 기조에 정면으로 역행한다. 기업들이 걱정하는 것은 오직 자사주 활용 제한과 소각 의무화뿐이다. 이미 법제화된 '주주충실 의무'는 안중에도 없다. 여전히 경영권 보호를 위한 의사결정 체계가 작동하고 있다.
한 IB업계 관계자는 "현 시점에서 EB 발행은 정권에 반기를 드는 것으로 보일 수 있어, 결국 오너가 직접 결정을 내려줘야 가능하다"고 말했다. 정부의 정책 기조에 역행하는 의사결정을 밀어붙일 수 있는, 강력한 오너십을 가진 기업에서 EB 발행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자사주 활용의 막차를 탈 것인지를 두고 '회장님'의 의중이 중요할 뿐, 여전히 주주는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한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기업의 재산권을 침해한다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지금의 기업 행보는 그 법제화 필요성에 더 큰 명분을 쌓아주고 있다. 자율에 맡겨두면 자사주는 주주가 아닌 오너와 경영진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된다는 점을 기업들이 스스로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 EB를 발행하는 기업이 누구를 위한 결정을 내리는지, 시장이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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