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노만영 기자] 벤처생태계에 만연한 경직된 의사결정 구조가 혁신 기업의 탄생을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고금리 국면 다운라운드(이전 대비 기업가치를 낮춰 진행하는 자금조달)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투자자 동의를 얻지 못해 파산하는 사례가 적잖다는 지적이다. 벤처업계의 경직성이 과거 정부 주도 여신(대출) 지원 정책에서 비롯된 리스크 회피 관행으로 굳어졌다는 지적이다.
한국벤처투자법학회와 한국벤처창업학회는 18일 서울 강남구 디캠프 선릉에서 투자계약과 경영 거버넌스의 미래를 주제로 세미나를 열고 스타트업의 효율적 거버넌스 구축과 이를 뒷받침할 정부 리더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벤처업 전반에 리스크 회피 관행이 잔존한 현실을 정부가 투자 생태계에서 주도적 역할로 바꿔내야 한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실제 국내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신주발행 등 중대한 의사결정에 대해 투자자 전원의 동의를 받게 돼 있다. 투자자 보호를 위한 사전동의권을 근거로 각 투자자가 사실상의 비토권을 행사할 수 있다. 김성훈 한국벤처투자법학회장(법무법인 미션 대표)은 "계약은 당사자들이 하지만 주식회사의 의사결정은 집합적으로 이뤄진다"며 "국내에선 투자자 한 곳이라도 반대하면 중대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없는 지배구조가 설정돼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회생·파산에 이르기 전 단계에서 유연한 의사결정이 필요한데 현장에서 보면 살릴 수 있는 회사들이 지배구조 경직성으로 인해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해외 기업들의 이사회 의결은 집합적 결정이라고 해도 지분율과 주주 간 계약을 통한 협상의 방식으로 정착돼 있다. 그러나 국내에선 개별 투자자 전원동의 관행이 깨지지 않고 있어 의사결정 속도와 확실성을 중시하는 글로벌 자본시장의 요구에 어긋나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다. 이 때문에 국내 벤처기업들은 해외 자금 유치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세미나에 참석한 한 관계자는 "한국 벤처생태계는 미국이나 싱가포르와 비교하면 기형적인 수준"이라며 "이미 고착화된 문제를 고쳐야 하는 과제를 떠안고 있다"고 말했다. 박희덕 트랜스링크인베스트먼트 대표도 "벤처투자 규모는 지난 10년 간 크게 늘어 글로벌 4위 수준에 이르렀지만 혁신 지수는 뒤처졌다"며 "업계에 입문한 지 25년이 지났지만 투자 계약은 전과 다름이 없다"고 전했다.
경직된 지배구조의 배경에는 과거 정부 주도의 여신 지원 정책 때 형성된 문화가 깊이 자리하고 있다. 위험 회피를 우선시 하던 논리는 정책 투자가를 거쳐 운용사들에도 전가돼 벤처생태계의 모험 자본 수용성을 저해하는 요소로 고착화됐다는 지적이다. 이렇다 보니 투자자들은 펀드에 손실이 나는 결정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다. 예컨대 마켓컬리를 운영하는 컬리는 2021년 말 기업가치를 4조원으로 평가받아 2500억원을 투자받았다. 하지만 최근 기업가치가 그 이하로 줄어든 상황에서 기업공개(IPO)와 다운 라운드가 불가능해 경영진이 차선책을 찾고 있다는 지적이다.
김성훈 협회장은 "과거 정부는 중소기업 여신 정책에서 모럴헤저드 기업에 대한 책임성 강화를 위해 대출금을 상환하지 못하면 연대 책임을 지는 조항을 두기도 했다"며 "이런 정책이 벤처투자에도 이어져 벤처캐피탈들도 모험 대시 출자금 손실로 인한 책임을 면피할 구조만 계약에 반영하면서 관행들이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이날 현장에선 이재명 정부와 시장 주체들이 벤처투자에 효율화한 지배구조 마련을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한다는 중지가 모아졌다. 집합적 의결 구조는 별도 입법 없이도 주주 간 계약을 통해 구현할 수 있어서다. 서광열 코드박스 대표는 "현장의 스타트업 대표들이 퍼포먼스 측면에는 관심이 많지만, 의외로 투자 계약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며 "향후 기업 경영에서 거버넌스 구조의 중요성을 제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벤처투자 시장에서 자금 공급의 핵심을 쥐고 있는 정부가 거버넌스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의견으로 세미나는 마무리됐다. 김성훈 협회장은 "거버넌스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제2의 네이버, 카카오 같은 기업들이 탄생할 수 없다"며 "국내 벤처투자의 핵심 주체인 정부가 투자 생태계에서 리더십을 이끌어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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