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안경주 금융부 부국장] 코스피 지수가 종가 기준 역사적인 8000포인트 고지를 밟았다. 지난 15일 고점을 찍고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가는가 싶더니, 불과 6거래일 만에 다시 8000선을 가볍게 탈환했다. 자본시장 일각에서는 올해 안으로 '코스피 1만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까지 조심스레 흘러나온다. 그리고 이 같은 분위기를 이끈 건 단연 '반도체'다.
실제로 지금 여의도 자본시장의 돈줄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보면 시장의 열망은 명확하다. 외국인 투자자의 뭉칫돈과 정부의 정책적 지원 사격은 일제히 인공지능(AI), 차세대 반도체, 전력 인프라, 로봇 등에 집중되고 있다. 첨단 산업을 육성하려는 국가적 전략의 무게중심 역시 과거의 2차전지 배터리와 전기차 바운더리에서 AI 인프라와 피지컬 AI 로봇 생태계로 빠르게 이동하는 모양새다.
이 흐름의 정점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있다. 글로벌 AI 경쟁이 격화되면서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첨단 파운드리의 전략적 가치가 급격히 커진 영향이다. 현대차도 마찬가지다. 로보틱스와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SDV), 미래 제조 플랫폼 기업이라는 새로운 이미지가 덧씌워지면서 시장의 조명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 뜨거운 첨단 산업의 축제 속에서 유독 존재감이 흐릿한 그룹이 있다. 바로 LG다.
물론 LG가 경쟁력을 잃었다는 뜻은 아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여전히 글로벌 최상위권 2차전지 배터리 기업이고, LG화학과 LG전자 역시 한국 제조업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들이다. 진짜 문제는 기술력이 아니다. 자본시장이 지금 당장 열광하며 멀티플을 몰아주는 테마와 LG의 현 사업 구조가 미묘하게 엇박자를 내고 있다는 데 있다.
냉정하게 말해, 현재 글로벌 산업계를 관통하는 첨단 기술 트렌드의 종착지는 결국 반도체와 대규모 인프라다. AI 산업의 경쟁력은 거대한 연산 능력과 이를 뒷받침할 초거대 데이터센터, 막대한 전력망 구축 속도에서 결정되며, 그 심장부에 HBM이 자리 잡고 있어서다. 삼성과 SK가 시장의 프리미엄을 독식하는 배경이다.
정부의 발걸음과 정책 금융의 지향점도 이 궤적과 정확히 일치한다. 산업은행을 중심으로 추진되는 '첨단전략산업기금'은 향후 5년간 최대 100조원 규모의 매머드급 지원을 예고하고 있다. 반도체, AI, 로봇, 미래차가 핵심 타깃이다. 표면적으로는 2차전지도 지원 대상에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정작 정책과 자금의 실제 무게중심은 반도체 공급망 확보 쪽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실제 투자 규모만 봐도 알 수 있다. 삼성과 SK가 추진하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는 총 600조원 수준의 민간 투자가 예정돼 있다. 전력망과 용수 인프라까지 연결되는 초대형 국가 프로젝트에 가깝다. 정책금융 입장에서도 지원 명분이 분명하다.
현대차그룹 역시 국내 투자 확대에 적극적이다. 올해 투자 규모를 역대 24조원까지 늘렸다. 울산과 화성 생산기지를 미래차 중심으로 전환하고, 로봇과 스마트팩토리 사업도 키우고 있다.
반면 LG의 상황은 다소 애매하다. 그룹의 핵심 성장축은 사실상 2차전지 배터리에 집중돼 있는데, 정작 대규모 투자의 무대는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 애리조나 공장에만 7조원 이상 투입할 예정이다. 현대차와 조지아주에 짓는 배터리 합작공장에도 5조7000억원이 들어간다. 여기에 GM·혼다 등과 추진 중인 북미 합작공장(JV)까지 합치면 미국 투자 규모는 이미 수십조 원대다.
기업 입장에서는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체제에서 북미 현지 생산은 사실상 생존 조건에 가깝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전략이 국내 시장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해석된다는 점이다.
정부가 첨단 산업 지원에 나서는 이유는 결국 국내 투자와 일자리 창출 때문이다. 한국 안에서 공장을 짓고 생산라인을 확대해야 정책적 명분도 강해진다. 삼성과 SK는 반도체라는 강력한 국내 투자 카드를 갖고 있다. 현대차 역시 미래 제조 생태계를 국내에 심고 있다.
반면 LG의 경우 국내 배터리 생산라인 증설이 상당 부분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 앞으로의 대규모 투자금은 구조적으로 미국과 유럽으로 향할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국내 정책 수혜와 증시의 핵심 흐름에서는 한발 비켜서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캐즘의 장기화도 부담이다. 전기차 시장 성장세가 둔화되고 중국 업체들의 저가 공세까지 겹치면서 배터리 산업 전반의 밸류에이션은 크게 낮아졌다.
LG가 에너지저장장치(ESS)나 고부가 배터리 시장 확대를 추진하고 있지만, 시장이 반응하는 속도는 AI 반도체나 로봇 산업과 확연히 다르다. 지금 자본시장은 단순히 현재 실적만 보지 않는다. 앞으로 어떤 산업이 세상을 바꿀 것인지, 어떤 기업이 미래 질서를 주도할 것인지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삼성에는 AI 반도체가 있다. 현대차에는 로봇과 SDV가 있다. 그런데 지금 LG를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는 여전히 배터리와 가전, 디스플레이다. 시장이 기대하는 미래 산업의 중심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최근 들어 LG 내부에서도 변화 움직임은 감지된다. 특히 LG전자를 중심으로 AI와 로봇 사업을 새로운 성장축으로 키우려는 시도가 빨라지고 있다.
특히 LG전자는 최근 홈로봇과 로봇 부품 사업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연내 휴머노이드 로봇용 액추에이터 양산 체제 구축을 추진하고 있으며, 오는 2028년 상업화를 목표로 가정용 로봇 개발에도 힘을 싣고 있다.
다만 아직 시장의 평가는 조심스럽다. 삼성의 AI 반도체나 현대차의 로보틱스처럼 대규모 투자와 명확한 미래 산업 그림으로 이어지기보다는 아직 초기 전략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결국 중요한 것은 기술 자체보다 시장이 납득할 수 있는 성장 스토리가 필요하다.
결국 LG에 필요한 것은 단순한 투자 확대가 아니다. 해외 생산 확대와 별개로 국내 시장과 투자자들을 다시 끌어당길 수 있어야 한다. 배터리 이후 LG를 대표할 다음 산업이 무엇인지, 시장은 아직 뚜렷한 답을 보지 못하고 있다.
첨단 산업의 흐름이 빠르게 재편되는 지금, LG 역시 새로운 미래 비전을 보여줘야 할 시점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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