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이슬이 기자] 노동조합 반발 이슈에도 불구하고 HD현대그룹이 계열사 합병 카드를 꺼낸 까닭에는 한미양국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맺은 약속으로 인한 압박감도 크게 작용했다. 미국 측은 지난 한미정상회담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 내에 미국산 군함이 생산된다면 아주 훌륭한 동맹의 상징이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고 전해진다. 지난 반세기 동안 금융 및 정보기술(IT) 서비스 산업에 집중하느라 제조업을 포기했던 미국은 중국과의 군비경쟁에서 큰 헛점을 발견했다. 공군에선 중국에 앞서지만 수적으로 열세인 해군력을 보강하는데는 최소 5~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는 비대칭 리스크다.
이 구멍을 메워줄 서방동맹의 유일한 제조업 강국이 한국인데 우리가 이른바 '마스가(Make America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를 제안하자 크게 반색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다만 미국은 이를 수용하면서도 현실화가 쉽지 않은 한 가지 전제 조건을 내걸었다. 마가(MAGA)를 주창해 대통령이 된 트럼프가 마스가의 효용을 직접적으로 얻으려면 그의 임기 내에 해당 프로젝트가 미국 내에서 현실로 이뤄지는 모습을 만들어야 한다는 당부다.
그럼 이는 부탁일까 청구일까. 경쟁에선 이미 한화오션이 선두로 나섰다. 사실상 버려졌던 미국의 초대 수도 필라델피아의 필리조선소를 1억 달러라는 상징적인 가격에 지난해 인수해 가동을 시작한 것이다. 한화가 한발 빠르게 움직인 것은 트럼프의 당선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한국 정부보다 앞서 군비 증강 헤게모니를 꿰찬 통찰력 덕분이다. 이를 김승연 회장이 주도해 관계를 쌓은 미국 보수주의 성향의 싱크탱크인 해리티지재단에서 비롯된 성과물이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이런 맥락에서 김승연 회장의 장남이자 재계 3세 가운데 가장 앞서나간다는 평을 듣는 김동관 회장은 이미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에게 잊지 못할 선물을 안겼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한미정상회담을 마친 후 필리조선소를 방문해 현지에서 건조한 스테이트 오브 메인호 명명식에 주빈으로 참석하게 한 것이다. 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이 허허벌판에서 K조선 기적을 일궈낸 것처럼 한국과 미국이 힘을 모아 마스가 기적을 현실로 빚어내자"며 "마스가 프로젝트는 (한미 양국이) 함께 항해할 새로운 기회로 가득한 바다의 새 이름"이라고 강조했다.
HD현대그룹은 미국에서 한국 대통령이 미제 군함의 명명식에 참석한 이튿날 합병 카드를 꺼내 들었다. 200조원 규모 마스가 사업을 두고 벌일 경쟁에서 한화가 확실히 앞서나가자 다급해진 모습이다. 정기선 부회장과 김동관 부회장은 둘다 경영일선에 참여하기 전부터 서로 알던 사이라고 한다. 김 부회장은 경영 참여 후 2015년 삼성테크윈과 탈레스, 토탈, 종합화학 등 4개사 빅딜을 성공시켜 능력을 입증했다. 정 부회장도 자사주 마법을 활용한 지주사 분할을 성공시켜 지분율을 높였고, 상장 계열사가 고루 성장하면서 결과적으로는 그룹의 가치를 2015년 14조원 수준에서 올해 100조원 이상으로 높이는 수완을 보였다.
하지만 김동관 부회장은 지난해 말 미국 거점인 필리조선소를 인수해 미국 상선·군함 시장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미국 군함을 해외에서 건조할 수 없도록 한 존스법을 피할 사실상 유일한 국내 조선사의 거점이다. 게다가 최근 50억 달러를 추가 투자해 연간 건조 능력을 스무배나 늘릴 계획이다. 조선업이 그룹 사업의 본질인 HD현대를 압박하기에 충분한 경쟁상대가 된 것이다. 더는 마냥 지켜볼 수 없다고 판단한 정기선 부회장이 이런 맥락에서 지배구조 개편이라는 승부수를 던진 셈이다.
조선 역량이나 체급을 감안하면 결국 HD현대가 중장기 주도권을 가져갈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한화가 선제적으로 먼저 내달렸지만 실제 군함 건조 실적이나 조선소 라인업, 블록 제작·납품 역량 등에서 HD현대가 우위라는 평가다. 도크를 꽉꽉 채운 HD현대중공업과 달리 HD현대미포는 연간 70척 건조 능력 가운데 스무척 이상의 여유가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 상원 의회는 공화당 주도로 해군 군함을 한국 등 동맹에 맡길 해군준비태세 보장법을 발의한 상황이다. 미포에서 거의 다 지은 군함을 미국으로 보내어 현지 조선소를 인수해 도색 등 파이널 터치를 마무리하고 진수식을 여는 것도 급한 여건 속에서 대안으로 제시된다.
업계는 정 부회장이 꺼내 든 합병 카드가 김 부회장이 선점한 구도를 얼마나 흔들 수 있을 지에 주목하고 있다. 군함을 포함한 특수선 사업은 노동조합의 파업 대상에 포함되지 않아 사측에도 유리한 구조다. 노조는 최근 고공농성에 이어 전면파업을 벌이며 투쟁수위를 높이고 있다. 노조는 기본급을 높여 각종 수당까지 올릴 계획을 주장하지만, 회사는 수주 상황과 경제환경에 대응할 격려금 인상으로 맞서고 있다. 이런 가운데 MRO 분야 확대는 노조의 위력을 자연스럽게 제어할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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