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이슬이 기자] 이번 주주총회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관측됐던 국민연금이 영풍·MBK파트너스의 손을 들어주면서 고려아연 최윤범 회장의 이사회 진입을 위한 계산이 복잡해졌다. 이사회 진입 문턱을 높여 영풍·MBK 측 의석 확보를 최소화하겠다는 전략을 내세웠지만 국민연금이 고려아연 측 후보 선임안에 의결권을 미행사하기로 하면서 최 회장 측 우호 인사의 당선 가능성이 낮아지는 상황에 직면했다.
23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19일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책위)는 오는 24일로 예정된 고려아연 정기주총에서 최윤범 회장을 비롯한 고려아연 측 후보 선임안에 의결권을 미행사하기로 결정했다. 국민연금이 보유한 의결권 지분 5.3%는 미국 측 크루서블JV가 추천한 월터 필드 맥랠런과 영풍-MBK 측 나머지 이사 후보들(최연석·최병일·이선숙)에게 절반씩 나눠서 행사하기로 했다. 고려아연 측이 제안한 제5호 안건인 이민호 감사위원 선임안에는 반대했으며 영풍·MBK 측 박병욱 기타비상무이사 후보에 대해서도 의결권 미행사를 결정했다.
이번 주주총회에서 최 회장 측과 영풍·MBK 측은 집중투표제 실시에 맞춰 서로 대비되는 이사 선임 전략을 세웠다. 최 회장 측은 후보 수를 줄여 개별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는 방식을 택했다. 반면 영풍·MBK 측은 다수의 후보를 추천해 이사회 내 의석을 최대한 확보하는 데 주력하는 모양새다.
임기가 만료되는 이사는 총 6인이지만 양측 모두 이보다 적은 수의 후보를 내세운 것은 집중투표제의 구조적 특성 때문이다. 집중투표제는 주주가 보유한 주식 1주당 선임되는 이사 수만큼의 투표권을 가지며 이를 특정 후보에게 몰아줄 수 있다. 후보 수가 적을수록 개별 후보가 받을 수 있는 득표수가 올라가는 만큼 상대적으로 더 적은 후보를 낸 진영의 이사회 진입이 유리해지는 구조다.
고려아연 측이 5인 선임안과 함께 사내이사 후보로 최윤범 회장과 황덕남 의장 단 2명만을 추천한 것 역시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경영권 분쟁의 직접 당사자인 최 회장으로서는 이번 주총에서 이사직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최 회장의 재선임이 부결될 경우 경영권 방어의 동력 자체가 상실될 수 있는 만큼 의석수에서 일부 손해를 보더라도 후보 수를 줄여 본인의 이사회 진입을 확실히 보장받겠다는 수성 전략이었다. 반면 영풍·MBK 측은 후보를 다수 추천하는 방식을 택했다. 전원 당선이 어렵더라도 이사회 내 의석을 최대한 확보하여 경영진에 대한 견제 장치를 마련하겠다는 의중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주총의 향방을 가를 국민연금이 예상 밖의 선택을 하면서 최 회장 측의 수성 전략에는 차질이 빚어지게 됐다. 국민연금은 경영권 분쟁이 시작된 2024년부터 집중투표제 도입 등 최 회장 측 안건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왔으나 이번에는 의결권을 포기하며 사실상 최 회장의 사내이사 재선임을 반대했다. 이에 따라 영풍·MBK 측은 국민연금의 표를 더해 약 44.75% 수준의 의결권을 확보했다. 미국 크루서블JV 또한 13.25%를 확보하며 영향력을 키웠다. 반면 최 회장 측은 우호 지분을 모두 포함해도 약 27.9%의 표만 확보한 상태로 경쟁해야 한다.
고려아연 측이 제안한 5인 선임안이 가결될 경우 후보 수를 최소화해 화력을 집중하려던 전략은 오히려 우군 인사의 진입을 막는 자충수가 될 가능성이 크다. 영풍·MBK 측이 후보 3명의 진입을 목표로 표를 배분할 경우 최연석·최병일·이선숙 후보의 각 득표율은 약 14.92%가 된다. 고려아연 측이 보유 지분을 최 회장과 황덕남 의장에게 균등하게 나누면 각각 13.95%의 표를 얻게 된다. 이 경우 크루서블JV(13.25%)는 득표율에서 밀리며 이사회 진입에 실패할 가능성이 커진다.
영풍·MBK 측은 크루서블JV 선임에 반대하지 않았으나 이번 주총 목표가 최대한 많은 의석 확보인 만큼 후보 3명 진입을 최우선 순위에 둘 것으로 보인다. 최 회장 측이 황덕남 의장 대신 크루서블JV 의석을 확보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도 있지만 이 역시 모험에 가깝다는 평가다. 크루서블JV가 최 회장의 완전한 우호 인사가 아니라는 시각이 여전한 데다 향후 미국 측 의사가 시장 상황에 따라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불확실성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풍·MBK 측이 제안한 6인 선임안이 가결될 경우 오히려 최 회장 측 후보들의 동반 진입 가능성이 열리는 역설적인 상황이 연출된다. 만약 영풍·MBK 측이 추천한 후보 4명 모두에게 표를 고르게 배분한다면 각각의 득표율은 11.18% 수준으로 낮아진다. 이 경우 최 회장 측 후보 2명과 크루서블JV 후보 모두 영풍·MBK 측 후보들의 득표율을 상회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6인 선임안 하에서는 최 회장 측이 후보 3인을 모두 이사회에 안착시키며 기존의 주도권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다. 상대측이 제안한 선임 규모 확대가 도리어 최 회장 진영의 수성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지점이다.
소액주주나 중립으로 분류되는 표심의 향방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변수다. 특히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의 권고에 따라 움직이는 기관투자자나 개인 주주들의 표가 한쪽으로 결집할 경우 득표율 격차가 실제 현장에서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기 때문에 주총 당일까지 치열한 표심 잡기 경쟁이 이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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