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패션 재벌'로 알려진 권오일 회장의 대명화학은 40여 개에 달하는 종속기업을 거느린 거대 그룹이다. 그 정점에는 인수합병(M&A)의 핵심 축 역할을 해온 4개의 코스닥 상장사가 자리하고 있다. 최근 인적분할과 합병을 통해 이들 상장사의 지배구조 개편 조짐이 포착되고 있다. 이에 딜사이트는 권 회장의 지배구조 현황과 변화의 흐름을 짚어본다. [편집자 주]
[딜사이트 박준우 기자] 권오일 대명화학 회장이 핵심 계열사 지배구조를 다시 짜는 '되돌림 전략'에 나섰다. 대명화학 계열사 가운데 가장 덩치가 큰 로젠(옛 코웰패션)과 모다이노칩을 하나로 합친다. 과거 로젠의 전신인 필코전자로부터 모다이노칩(옛 이노칩테크) 지분을 넘겨받으며 지배구조를 분리했던 것과는 반대 행보다.
이는 과거 의도적으로 분리했던 상장사 구조를 재결합하는 이례적 선택으로, 장기간 이어진 주가 저평가를 돌파하기 위한 승부수로 풀이된다. 분산된 상장 구조에서 발생하던 할인 요인을 줄이고 단일 법인으로 기업가치를 재평가받겠다는 의도가 깔린 것으로 보인다.
18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로젠은 최근 이사회를 열고 모다이노칩을 흡수합병하기로 결의했다. 합병 구조는 로젠이 존속법인이 되고 모다이노칩은 소멸하는 방식이다. 합병비율은 로젠 1주당 모다이노칩 0.9754112주로 사실상 1대1에 가깝다. 합병가액은 각각 2047원, 1997원으로 책정됐다.
로젠은 운송 사업을 주력으로 하고 있다. 과거 전자부품, 의류유통, 운송사업을 영위했지만, 2023년 말 패션사업부(폰드그룹)를 인적분할하면서 운송 부문이 전체 매출의 90%를 차지하게 됐다. 이후 지분 100%를 보유한 로젠을 지난해 흡수합병하면서 사명을 코웰패션에서 로젠으로 변경했다.
모다이노칩의 경우 전자부품과 의류 유통 사업을 영위한다. 본업은 전자부품이지만, 의류 유통 기업 모다 인수 이후 의류 유통 비중이 크게 확대돼 전체 매출의 90%가 해당 사업 부문에서 발생하고 있다.
합병이 완료되면 로젠은 단숨에 자산 2조원에 육박하는 대형 법인으로 올라선다. 지난해 3분기 기준 로젠(9813억원)과 모다이노칩(9492억원)의 자산을 단순 합산하면 약 1조9000억원 규모다.
실적 역시 확대된다. 같은 기간 로젠은 매출 5854억원, 영업이익 203억원을 기록했고 모다이노칩은 매출 2640억원, 영업이익 165억원을 냈다. 외형과 이익 규모가 동시에 커지면서 기관 투자자 수급 유입 등 밸류에이션 재평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이번 합병의 본질은 단순 사업 통합이 아니라 상장사를 축으로 한 지배구조 재정렬이다. 대명화학은 현재 로젠, 모다이노칩, 폰드그룹, 디에이피 등 4개 상장사를 통해 그룹을 지배하고 있다. 비상장사를 직접 인수하기보다 상장사를 활용해 몸집을 키워온 기존 M&A 전략의 연장선이다.
특히 두 회사는 그룹 내 핵심 축이다. 2024년 말 기준 두 법인이 대명화학 자본총계(3조2170억원)의 약 60%를 차지하는 핵심 자산이다. 이를 하나로 묶는 것은 단순 합병을 넘어 그룹 가치의 중심축을 재구성하는 작업으로 해석된다.
주목할 부분은 로젠과 모다이칩 모두 상장사라는 점이다. 권 회장은 대명화학을 통해 로젠과 모다이노칩, 폰드그룹, 디에이피 등 총 4개 상장사에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여태껏 대명화학은 비상장사를 직접 인수해 종속기업으로 편입시키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인수합병(M&A)은 상장사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진행해왔다.
이번 결정이 주목받는 이유는 과거와 정반대 행보 때문이다. 대명화학은 2009년 필코전자(현 로젠)를 통해 이노칩테크(현 모다이노칩)를 인수하며 간접 지배구조를 구축했다. 이후 2013년에는 지분을 직접 사들이며 사업별 가치 부각을 위해 지배구조를 분리했다.
또 2016년에는 패션기업 '모다'를 이노칩테크에 합병시키며 현재의 모다이노칩 구조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후 두 상장사 모두 주가 부진이 장기화되면서 '분리 전략'의 효과가 제한적이었다는 평가가 나오자, 다시 통합 카드로 방향을 선회한 것으로 풀이된다.
시장에서는 이번 합병을 저평가 해소를 위한 구조 개편 시도로 보고 있다. 현재 두 회사 모두 극단적인 저PBR 상태다. 3월 16일 기준 주가순자산비율(PBR)은 로젠 0.27배, 모다이노칩 0.47배에 불과하다. 자기자본 대비 절반에도 못 미치는 시가총액(로젠 1132억원, 모다이노칩 1686억원)은 전형적인 '지배구조 할인'과 '중복상장 할인'이 반영된 결과라는 해석이 나온다.
주가 흐름도 부진하다. 로젠은 2023년 말 1만원대에서 현재 2000원대로 급락했고, 모다이노칩 역시 1000~2000원대에 머물고 있다. 사업 경쟁력 대비 시장 평가가 크게 낮아진 상태가 장기간 지속된 셈이다. 2016년 이노칩테크가 모다를 흡수합병하던 당시 6000대였던 점과 비교하면 그 격차가 더욱 크다.
로젠 측은 모다이노칩을 흡수합병하고 난 뒤 경영 효율성과 사업 경쟁력이 강화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특히 로젠이 택배 사업을, 모다이노칩이 의류사업을 영위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너지가 예상되는 만큼, 기업 가치 재평가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번 합병을 사업 시너지 중심으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양사 간 내부거래 규모는 크지 않다. 지난해 3분기 기준 내부거래 매출은 61억원 수준에 불과하다. 합병으로 내부거래 제거 효과가 제한적인 만큼 단기 실적 개선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다.
또 모다이노칩의 핵심 사업이 아울렛 기반 의류 유통이라는 점에서, 택배 중심의 로젠과 직접적인 사업 시너지도 제한적일 수 있다. 결국 이번 합병은 사업 결합보다는 재무적·구조적 통합 성격이 강하다는 분석이다.
관건은 시장의 평가다. 지배구조 단순화와 외형 확대가 '밸류에이션 리레이팅'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이질적 사업 결합으로 '콘글로머릿 디스카운트'를 키울지는 아직 미지수다. 물류와 유통을 동시에 영위하는 통합 법인을 시장이 어떤 산업으로 정의하고 평가할지에 따라 기업가치 방향이 갈릴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딜사이트는 합병 배경을 질의하기 위해 연락을 취했지만 답변을 듣지 못했다. 대명화학 관계자는 "담당자를 통해 연락을 드리겠다"고 말했지만 이후 연락이 오지 않았다. 로젠 측에도 같은 질의를 했지만 답변을 듣지 못했다. 로젠 관계자는 "공시된 것 외에는 답변이 어렵다"고 짧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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