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딜사이트 김진욱 부국장] 최근 지인의 장례식장에서 만난 게임업계 인사로부터 흥미로운 일화를 들었다. 1990년대 중반, '바람의 나라'와 '리니지' 개발자로 잘 알려진 송재경 전 XL게임즈 대표가 카이스트 전산학과 재학 중이던 시절 이야기다. 송 전 대표가 있었던 연구실에서 한 달 인터넷 통신비로 500만원 이상이 청구돼 문제가 됐다. 당시 송 전 대표는 텍스트 기반 롤플레잉 게임인 '머드게임'에 몰두해 밤이 새도록 인터넷을 통해 게임을 즐겼다. 연구와 무관한 사용으로 이 비용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됐다. 고민하던 끝에 당시 지도교수였던 전길남 박사가 직접 비용을 대납하며 일단락됐다.
이후 그는 고(故) 김정주 전 대표와 함께 넥슨을 창업했고, 세계 최초의 그래픽 기반 온라인 게임인 '바람의 나라'를 선보였다. 이 소규모 시도가 지금의 넥슨, 나아가 한국 온라인게임 산업의 출발점이 됐다.
이 에피소드를 듣다 보니 최근 외신을 통해 전해진 텐센트의 넥슨 인수설이 연결된다. 만약 이 시나리오가 현실화한다면 단순한 기업 인수를 넘어 산업과 문화 양면에서 적지 않은 파장을 남길 수밖에 없다. 이는 과거 1989년 일본 소니가 미국 콜롬비아 픽처스를 인수했을 때 미국 사회가 느꼈던 감정과 유사할 수 있다. 영화라는 문화 산업의 대표주자가 외국 자본에 인수됐다는 사실에 당시 미국인들에게는 자존심의 상처였다.
넥슨이 한국 사회에서 갖는 의미도 단순한 민간 기업 그 이상이다. 1990년대 말 정부의 IT(정보통신) 산업 육성 정책 아래 병역특례 제도, 인터넷 인프라 구축, 우수 인재 양성 등 제도적 기반 위에서 성장한 대표 기업이다. 김정주 대표는 서울대 후배들을 직접 찾아가 자유로운 벤처 문화와 창의적 개발 환경을 강조하며 인재 영입에 나섰다. 당시 병역특례는 핵심 인재 확보에 실질적인 무기가 됐고, 이는 이후 넥슨이 확보한 기술력과 콘텐츠 역량의 기반이 됐다. 논란이 있기는 했지만 김정주 자신도 그 혜택을 누렸다.
이에 앞서 예비 창업자들에게 학비를 지원하며 카이스트에서 마음껏 하고 싶은 시도를 할 수 있도록 해준 한국의 교육 시스템이 만든 대표 성공 모델이다.
그만큼 넥슨의 성장은 곧 한국 사회가 만들어낸 집합적 성취이기도 하다. 값싸고 우수한 인재를 장기간 확보할 수 있었고, 이들이 다시 산업 생태계 전반으로 확산돼 지금의 게임 산업을 구축했다. 단순히 회사 하나가 성공한 것이 아니다. 정부가 IT 산업 활성화를 위해 공공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이 위에 꽃을 피운 산업이다.
그런 넥슨이 해외, 특히 중국 자본에 매각된다는 가정은 산업계는 물론 일반 대중에게도 심리적 저항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 게임이 단순히 재무제표로만 평가할 수 없는 문화 콘텐츠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다행히 텐센트 측은 최근 해당 보도에 대해 '사실 무근'이라는 입장으로 일단락됐다. 하지만 자본시장에서는 이 이슈가 언제든 다시 부상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텐센트는 지난해 142조원의 매출과 39조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한 글로벌 게임 플랫폼이다. 같은 해 넥슨은 4조3000억원의 매출, 1조3000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텐센트 입장에서 넥슨 인수는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수준의 규모다.
그러나 현실은 수치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국내 게이머와 산업 종사자들이 넥슨에 대해 갖는 감정과 기억, 그리고 문화적 상징성은 숫자보다 더 복잡하다. 특히 중국으로 넘어간 넥슨이 지금과 같은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어갈 수 있을지도 물음표다. 일례로 한국의 액토즈소프트가 중국 샨다에게 인수된 경험이 있다. 그리고 지금 액토즈소프트가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 지를 보면 반면교사가 될 듯하다.
ⓒ새로운 눈으로 시장을 바라봅니다. 딜사이트 무단전재 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