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딜사이트 최유라 기자] "과거에도 석유화학 다운사이클(침체기)을 겪었지만 이번 불황은 과거보다 골이 더 깊고 길어졌다. 사실 정부 정책으로 당장의 불황을 반등시킬 수 없고 당분간 중국발 공급과잉이 해소되기도 힘들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고부가가치 사업 발전을 위해서는 기업의 장기적인 전략과 정부의 속도감 있는 정책 추진이 절실하다."
한 석유화학 업체 관계자는 지난달 말 정부가 발표한 '석유화학산업 경쟁력 강화방안'에 대해 이같이 총평했다. 길어진 불황기에 때로는 푸념처럼 때로는 체념처럼 기자에게 한 말이다. 그럼에도 고부가 제품 중심의 사업재편이 필요한 시점에 정책이 발표된 것에 의미가 있다는 평가도 덧붙였다.
정부에서 산업 경쟁력 강화방안을 발표한 것은 박근혜 정부 당시인 2016년 9월 이후 8년 만이다. 불황이 장기화한 상황에서 석유화학 정책의 의미는 더 남다르다. 신학철 한국화학산업협회장(LG화학 부회장)도 지난 9일 '2025년 화학산업 신년인사회'에서 "정부에서 석유화학업계의 쉽지 않은 상황을 감안해 여러 계획을 발표한 것에 대해 굉장히 고무적으로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물론 정부 정책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기는 힘들다. 정부는 정책금융 자금지원 규모를 3조원으로 책정했다. 대규모 장치산업인 석유화학의 특성을 감안하면 턱 없이 적은 액수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략적으로 사업재편을 추진하는 기업에게 설비투자·연구개발(R&D)·운영자금 등 저리대출과 보증료 0.2~0.5%포인트(p) 차감 등을 지원한다. 기업활력법 혜택도 제공한다. 기업이 구조 변경이나 사업 혁신 활동을 통해 경쟁력을 높이고자 사업재편을 추진할 때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특례를 부여하는 제도다.
일각에선 정부 주도의 과감한 빅딜(통폐합)이 추진돼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빅딜은 석유화학이 공급과잉으로 수익성 악화에 시달릴 때마다 단골손님처럼 거론됐던 사안이다. 그리고 과거 일본 정부의 석유화학 구조조정이 그 성공사례로 따라다닌다. 1990년대 일본 석유화학 기업은 불황에 닥치자 정부와 합심해 과감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2000년대에 들어선 이후에도 범용제품 설비를 축소하고 고부가 제품 중심의 생산라인 구축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정부는 인위적 구조조정을 애당초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유는 설비과잉을 빅딜로 해결하기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판단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기업들의 오너 경영체제 특성상 각 기업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설비과잉을 청산하기 위해 정부가 과거 독재정권처럼 구조조정이나, 통폐합을 시도할 경우 기업 및 근로자의 거센 반발도 부담이다.
업계 관계자는 "경쟁력 제고방안이 발표되기에 앞서 구조조정은 국가가 개입할 사안이 아니라는 업계 입장을 관계부처에 전달했고, 정부도 같은 의견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기업의 대주주는 대부분 금융권인 반면 우리나라는 재벌경영이 대부분"이라며 "정부 주도로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를 풀어내기 만만치 않다"고 짚었다.
그렇다면 정부가 업계의 사업재편을 어떻게 뒷받침해야 할까. 당장의 업황 침체를 뒤집을 만할 대책이 사실상 없으니, 무엇보다 긴 시간을 두고 고부가 중심의 포트폴리오 다변화를 지원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다 적극적인 R&D(연구개발) 지원이 필요하다.
그리고 정작 기업간 M&A가 추진되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다. 기업을 주춤거리게 만드는 걸림돌은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공정거래법)이다. 기업들은 의견을 논의하다가 자칫 담합 의혹에 휩싸이는 것을 우려한다. 결론적으로 정부 주도로 사업재편이 어렵다면 민간이 주도적 역할을 하도록 판을 깔아야 한다. 수년만에 나온 정책이 반쪽짜리에 불과하다는 비판에서 벗어나려면 공정거래법 규제를 한시 유예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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