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주 금융부 부국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관련 재판에서 대법원으로부터 최종 무죄를 받았다. 이로써 그룹을 옥죄던 사법 리스크가 사실상 종결됐다. 하지만 사법의 터널을 빠져나온 삼성 앞에 이번엔 회계와 지배구조라는 더 복잡한 쟁점이 놓였다. 주인공은 삼성전자가 아니라 삼성생명이다.
최근 삼성생명이 삼성화재를 자회사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회계기준 논란이 불거지면서 그룹 지배구조의 정당성과 보험계약자 보호 이슈가 동시에 수면 위로 올라왔다. 논란의 핵심은 회계 기준 자체가 아닌 이를 둘러싼 '수익 귀속의 정당성'과 '지배권 유지 방식'에 있다.
신호탄은 한국회계기준원이 쐈다. 최근 열린 '생명보험사의 관계사 주식 회계처리' 포럼에서 이한상 한국회계기준원장은 삼성생명을 "회계의 블랙홀"이라 표현했다. 삼성생명이 유배당 상품 계약자의 자금으로 삼성전자·삼성화재 주식을 취득하고도 그 수익을 계약자에게 돌려주지 않는 구조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특정 기업을 지목해 회계 기준 문제를 공개 지적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업계 일각에선 "포럼 자체가 삼성을 겨냥한 기획"이라는 해석도 내놨다.
핵심 쟁점은 두 가지다. 첫째는 삼성화재 지분 15.43%의 회계 분류 문제다. 삼성생명은 해당 지분을 '기타포괄손익-공정가치측정(FVOCI)'으로 처리하고 있다. 이 경우 삼성화재의 이익은 삼성생명 실적에 반영되지 않는다.
하지만 회계기준원은 삼성생명이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며 지분법 회계를 적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분법이 적용되면 삼성화재 실적이 삼성생명의 순이익으로 연결되지만, 동시에 계약자에게 돌아가는 배당 가능 이익도 커지게 된다.
둘째는 유배당 상품 계약자 이익의 회계 처리다. 삼성생명은 2022년부터 계약자에게 돌아갈 이익을 '보험부채'가 아닌 '계약자지분조정'으로 분류해왔다. 이는 "주식을 매각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회계 처리다.
하지만 올해 삼성전자의 일부 지분 매각이 이뤄지면서 이 전제는 흔들렸고, 회계기준원은 이에 따라 보험부채 재산정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경제개혁연대는 삼성생명이 계약자에게 배분하지 않은 미지급 배당 추정치를 7조원 이상으로 추산하고 있다.
사실 이 문제의 본질은 삼성의 지배구조와 맞닿아 있다. 삼성생명이 유배당 계약자의 자산으로 확보한 삼성전자 지분은 그룹 지배력의 핵심 수단이 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장에서는 이 지분이 계약자 자산이 아닌, 그룹 지배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로 이어지는 지배구조 사슬에서 삼성생명은 사실상 '허리' 역할을 맡고 있다. 문제는 이 구조가 회계 기준상 정당성, 보험업법상 규제, 그리고 자본시장 내 수익 귀속 원칙과 모두 충돌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같은 구조를 겨냥한 '삼성생명법'은 보험사의 계열사 지분 보유 한도를 취득원가가 아닌 시가 기준으로 바꾸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재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은 8.5%에 달하지만, 이는 장부상 취득가 기준으로 규제를 회피한 결과다.
법안이 통과될 경우 삼성생명과 삼성화재는 삼성전자 지분 상당수를 매각해야 하며, 이는 곧 기존 지배구조의 근간이 흔들리는 결과로 이어진다.
시장에서는 "삼성물산이 직접 지배력을 확보해야 하며, 이에 필요한 자금만 수십조원대"라는 분석도 나온다. 최근 삼성이 바이오 계열사의 인적분할을 추진하거나, 자산 유동화를 모색하는 움직임도 이런 변화를 대비한 사전 포석으로 해석된다.
이재용 회장이 사법 리스크에서 자유로워졌다고 해도, 자본시장과 보험계약자의 신뢰까지 회복된 것은 아니다. 계약자 보호, 회계 투명성, 그리고 지배구조의 정당성이라는 더 무거운 과제가 남아 있다. 단 하나의 회계 처리로 그룹 전체의 지배구조가 뒤흔들리는 구조라면, 그 구조 자체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삼성은 과거 위기를 '결자해지' 방식으로 극복해왔다. 지금도 선택지는 두 갈래다. 기존 회계 방식을 고수하며 버티느냐, 아니면 논란을 수용하고 구조적 체질 개선에 나서느냐다. 어느 길을 택하든 중요한 것은 하나다. '삼성'이라는 이름이 지닌 사회적 무게에 부합하는 신뢰 회복, 삼성의 지배 체계가 설득력을 갖느냐가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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