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이성희 차장]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우리'라는 단어의 의미는 참 애틋하다. 관계성과 연결성을 중시하는 특유의 가족문화 기반의 사회에서 '나'나 '너'가 아닌 '우리'로 서로를 한 울타리 안에 포함시키려 하는 인식의 기저가 있어서다. 은근히 친밀감을 고취시키는 효과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단순히 영어 단어 'We'로 번역할 수 없는 한국적 정서가 내포돼 있다.
원로가수 송창식 씨의 명곡 '우리는'이라는 노래의 가사가 이러한 정서를 잘 표현하고 있다.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도 찾을 수 있는, 아주 작은 몸짓 하나라도 느낄 수 있는, 소리 없는 침묵으로도 말할 수 있는, 마주치는 눈빛 하나도 모두 알 수 있는" 관계가 바로 '우리'다.
우리 엄마, 우리 아빠, 우리 형, 우리 동생, 우리 친구, 우리 동네, 우리 학교, 우리 나라 등 개인부터 국가까지 확장성도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시중은행 중에서도 '우리'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있다.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최초의 은행인 우리은행은 역사 만큼 변천사가 다양하다. 대한천일은행에서 조선상업은행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엔 한국상업은행이 됐다. 1998년 한일은행과 합병하면서 한빛은행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2002년 현재의 우리은행이라는 이름을 갖추게 됐다.
우리은행이라은 이름을 쓰는 데도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 2007년 '우리'라는 보통명사를 고유명사인 사명으로 쓸 수 있느냐는 문제 제기가 은행권에서 일면서 상표등록 무효소송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우리은행이 승소하면서 '우리'라는 명칭을 지킬 수 있었다.
타 은행에서도 질투할 만한, 고객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우리은행이지만 은행권 종사자들은 우리은행을 우리은행이라 부르지 않는다. 타 은행 직원이 소속은행을 얘기할 때 '우리 은행'이라고 칭하게 될 경우 '우리'라는 단어가 경쟁 은행인 우리은행으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해서 부르는 별칭이 '워리'은행이다. 다만 우리은행으로선 이러한 별칭이 달갑진 않다. 영어 단어 '워리(Worry)'가 주는 부정적 뉘앙스 탓이다.
말이 갖는 힘이라는 게 있다. 실제로 최근의 우리은행은 '워리'은행이라 불려도 할 말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복된 금융사고가 원인으로, 특히 사상 초유의 전직 금융지주 회장이 연루된 부당대출 사건이 기폭제 역할을 했다.
우리은행은 쇄신의 차원에서 행장을 교체하는 특단의 결단을 내렸다. 조병규 행장 역시 연임을 포기하면서 인적 쇄신의 길을 열어줬다.
차기 행장은 시작부터 무거운 짐을 안게 됐다. 은행장과 지주 회장이 감독당국의 검사와 검찰의 수사 대상이 되고, 금융사고 온상지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실추된 신뢰 이미지를 다시 재구축해야 한다. 또 이 과정에서 꺾여버린 직원들의 사기도 고취시켜야 한다. 내부 안정화와 더불어 금리하락 기조 속 은행의 실적도 방어해야 한다.
무엇보다 고질적인 병폐로 지적되고 있는 상업-한일은행 출신 간 갈등 구조도 타파해야 한다. 우리은행의 계파갈등이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지적되고 있는 만큼 임직원들의 진정한 화합을 이끌어 내야 한다는 막중한 임무가 기다리고 있다. 어떻게 보면 내부 직원들에서부터 둘로 나뉘어져 갈등 구조를 이어가고 있는 은행이 '우리'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역사 속 뛰어난 리더십을 갖췄던 인물 중 하나로 청나라의 강희제가 꼽힌다. 현 시대 리더들이 강희제에게 본 받을 만한 점들이 여럿 있겠지만 차기 우리은행장에게는 '만한전석(滿漢全席)'의 이치를 유념하라고 권하고 싶다. 중국의 연회 요리인 '만한전석'은 지배민족인 만주족과 피지배민족인 한족 사이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만주족과 한족의 요리를 잔치에서 다 같이 성대하게 차려냈던 코스요리로, 강희제가 직접 고안해 지시했다고 한다. 만주족과 한족의 진정한 통합을 이끌어 낸 강희제는 무려 61년을 통치하며 '천년에 한 번 나옴직한 제왕'이라는 뜻의 '천고일제(千古一帝)' 호칭을 얻었다.
우리은행이 은행장 교체를 통해 진정한 '우리'은행으로 거듭나길, 이를 통해 우리들에게 사랑받는 은행으로 이름 값을 톡톡히 하길 기대해 본다. 새로운 은행장 역시 어깨가 무겁겠지만, 위기를 잘 수습하고 내부 안정과 실적 상승이라는 성과를 거둔다면 우리은행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기는 CEO(최고경영자)로 남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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