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차화영 기자] 은행권이 수년째 퇴직연금 계좌의 상장지수펀드(ETF) 실시간 거래 허용을 요구하고 있지만 금융당국은 '불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ETF 중심으로 연금 운용 환경이 빠르게 재편되는 가운데, 은행 채널만 실시간 매매가 막혀 있는 구조가 고착되면서 자금 이동과 업권 간 격차가 동시에 확대되는 양상이다.
30일 금융권에 따르면 주요 은행장들은 최근 내부 회의와 비공개 간담회에서 '퇴직연금 경쟁력의 핵심은 ETF 접근성'이라며 은행 앱 내 실시간 거래 허용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은행연합회를 중심으로 업권 공동 건의도 검토 중이지만, 제도 개선 가능성은 낮다는 게 중론이다.
은행권의 요구는 단순한 상품 확대가 아니다. 투자자가 연금 계좌 안에서 ETF 가격을 확인하고 원하는 시점에 직접 사고팔 수 있는 '투자 환경' 자체를 요구하는 것이다. 현재처럼 주문을 위탁하면 일정 시간이 지난 뒤 체결되는 구조로는 증권사와 동일한 투자 경험을 제공하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즉, 증권사처럼 즉시 사고팔 수 있는 환경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현행 은행 퇴직연금 계좌의 ETF 거래는 신탁 방식으로 이뤄진다. 고객 주문을 모아 증권사를 통해 처리하는 구조여서 통상 수십 분의 시차가 발생한다. 반면 증권사 계좌에서는 실시간 호가를 보며 즉시 체결이 가능하다. 이 차이는 단순한 편의성 문제가 아니라 실제 투자 결과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변수로 지목된다. 변동성이 큰 장에서는 짧은 시간 차이로도 체결 가격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객 입장에서는 같은 ETF를 두고도 은행과 증권사 중 어떤 채널을 이용하느냐에 따라 투자 경험과 수익률이 달라질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된 셈이다.
그럼에도 금융당국은 이 같은 요구에 대해 선을 긋고 있다. ETF 매매 기능은 투자중개업에 해당하는 만큼 이를 허용할 경우 은행이 증권사의 고유 영역을 침범하게 되고, 현행 규제 체계와 충돌할 수 있다는 게 금융당국의 판단이다. 실제로 2021년 KB국민은행이 관련 서비스 도입을 위해 비조치의견서를 제출했지만 금융당국은 '불가'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결국 쟁점은 은행에 투자중개 기능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로 귀결된다.
문제는 제도가 멈춰있는 사이 시장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퇴직연금 실물이전 제도 시행 이후 ETF 등 실시간 매매가 가능한 상품을 선호하는 투자자들이 증권사로 이동하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은행을 선호하던 고객들조차 ETF 거래를 위해 증권사 계좌를 선택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설명한다.
수치에서도 흐름은 확인된다. 금융감독원 통합연금포털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은 약 496조8000억원으로 1년 전보다 15% 증가했다. 이 가운데 은행 비중은 52.4%로 여전히 가장 크지만, 증권사 적립금 증가율은 26.5%로 은행(15.4%)의 두 배 수준을 기록했다. 단순 성장 속도만 놓고 보면 무게 중심이 이동하고 있는 셈이다.
ETF 시장 자체도 급팽창하고 있다. 2022년 79조원이던 국내 ETF 순자산총액은 현재 400조원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으며, 업계에서는 2030년 1000조원 규모까지 성장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과거 예금 중심이던 퇴직연금 운용 방식이 ETF 기반 투자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처럼 시장 환경이 바뀌고 위기감도 커지면서 은행권 역시 같은 요구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ETF 접근성이 제한된 상태가 지속될 경우 '고객 이탈→자산 감소 →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다. 규제가 시장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은행권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은행을 선호하는 고객도 있는데 ETF 거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증권사로 가야 하나 고민하는 소비자도 적지 않을 것"이라며 "장기적으로 무엇이 소비자에게 이로운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거래 편의성 확대와 함께 투자 위험 관리·상품 이해도 측면의 보완 장치가 병행돼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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