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채권 시장에서 '한국물(Korean Paper)'이 존재감을 높이고 있다. 연간 발행액이 900억 달러를 넘어서 최대치를 기록 중이다. 그러나 외화채 주관 시장은 글로벌 투자은행(IB)이 주도하고 있다. 국내 증권사 투자은행(IB) 부서들은 수익성과 성장 한계에 부딪힌 원화채 시장을 넘어, 글로벌 부채자본시장(DCM)이라는 새 경쟁 무대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증권업계는 최근 정부의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부터 일반 기업의 외화채 발행까지 영역을 넓혀 의미 있는 도전을 시작했다. 주요사 행보를 따라가보면 도전과 기회를 가늠할 수 있다.
[딜사이트 이소영 기자] 글로벌 투자은행(IB)이 장악해 온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 시장에서 그동안 트렉레코드를 쌓아온 미래에셋증권이 아닌 KB증권이 주관사로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다. 2020년 미래가 남긴 외평채 실적을 국내 경쟁사인 KB증권이 5년 만에 이은 셈이다.
KB증권은 최근 롯데물산의 외화채 발행에서도 대표 주관사로 참여했다. 국내 DCM 시장에서 롯데그룹과 견고한 네트워크를 이어나가며 신뢰관계를 쌓은 점과 KB국민은행의 신용보증이 거래를 이끈 주요 배경으로 꼽힌다. KB증권은 이런 성과를 발판으로 글로벌 IB 경쟁에서 의미 있는 초기 입지를 구축했다는 평가다.
실제 KB증권은 올 들어 외화채(KP물) 발행만 3건의 주관 업무를 따냈다. 구체적으로 ▲국민은행과 ▲롯데물산 ▲외평채 딜 등이다. 이 가운데 외평채는 단연 주목되는 랜드마크 딜이다. KB는 프랑스 대표 IB인 크레디아그리콜(CA)과 영국 HSBC, 미국 JP모건, 골드만삭스(GS)와 함께 공동주관사로 이름을 올리는 반열에 올랐다. 올해 외평채의 발행 규모는 약 16억 달러(한화 약 2조2000억원) 수준으로 3년, 7년 만기로 나눠 발행됐다. 가산금리도 3년물 0.25%p, 7년물 0.52%p로 역대 최저수준을 기록했다는 평이다.
사실 국내 증권사 가운데 외평채 주관사 참여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4년 삼성증권이 홍콩 거점을 글로벌 IB로 키우겠다고 나선 시기 처음으로 외평채 주관을 맡았고, 이후 2020년 미래에셋증권이 글로벌 IB들과 콜라보레이션을 담당했다. 조단위의 외평채를 발행할 경우 주관사는 그 배분액을 해외 자산운용사에 세일즈 해야 하는데 국내사들의 경우 물량을 소화할 운용사 네트워크가 부족하기 때문에 업무를 할당받지 못하는 한계점이 있다. 그러나 삼성이나 미래는 관련 문제를 미국 법인을 통해 해결하기로 하면서 주관 업무를 수임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이런 맥락에서 해외 사무소나 법인이 부족한 KB증권이 외평채 주관을 맡은 것은 이례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해외 네트워크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도 국내 IB 육성 차원에서 정부와 민간이 협업 가능성을 다시 열어놓은 사례가 됐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 외화채 시장에 주요 증권사들이 적극적인 드라이브를 거는 상황에서 KB가 막혀 있던 물꼬를 텄다"며 "이번을 계기로 다른 국내사들도 도전을 할 여지가 생겼다"고 말했다.
KB증권 나름대로는 발빠른 조직 정비와 꾸준한 투자를 기울인 것으로 알려졌다. 2021년 증권업계 최초로 외화채 전담 조직을 신설했고, 기업금융 2부 내에 글로벌(Global) DCM팀을 꾸려 관련 비즈니스 강화에 주력했다. 박재형 글로벌DCM 팀장은 기재부 설득을 위해 세종을 오가면서 영업을 리드했고, 원화채보다 시장 규모가 크고 수수료 수익이 높은 외화채 시장 마케팅의 기틀을 잡은 주역으로 손꼽힌다.
KB증권의 모그룹은 KB금융지주 역시 관련 비즈니스를 지원한 숨은 주역이다. 그룹의 계열사인 KB캐피탈과 KB국민은행, KB국민카드, KB증권, KB 인니법인(Bukopin Indonesia) 등이 발행한 글로벌 채권 거래에 KB증권을 주관사로 참여하게 하면서 실적과 노하우를 축적하게 만들었다. 더불어 한국수출입은행과 한국주택금융공사 등 국책·공공기관의 외화채 딜에도 KB증권의 수임을 꾸준히 지원해 관련 시장의 플레이어로 존재감을 나타나게 했다는 평가다. 외평채 수임 전까지 4년 간 그룹의 조직적인 지원이 전개됐다는 의미다.
KB증권에 앞서 외평채 주관 실적을 쌓은 미래에 삼성은 정부 지원을 바탕으로 관련 비즈니스의 토대를 마련해온 공적이 있다. 다만 코로나19(COVID 19) 이후로 명맥이 끊겼던 외평채 시장에서 관련 불씨를 다시 지핀 것은 KB증권의 성과라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KB증권은 2021년 수출입은행 해외채 발행 주관을 기점으로 22건의 외채 발행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정부 역시 이번 외평채 주관사 선정전에서 이러한 점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지원은 민간영역에서도 국내사의 입지를 넓히는 계기가 되고 있다. 최근 롯데물산의 외화채 발행에서 KB증권은 주관사로 참여해 2022년 관련 조직 신설 이후 첫 성과를 도출했다. 관련 트렉레코드 외에 KB증권은 롯데그룹과 그간 탄탄한 관계를 구축해 왔다. 올 상반기 기준 롯데 계열사 8곳이 채권 발행에 나섰는데 이 중 6개 거래를 KB증권이 수임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롯데건설과 롯데렌탈, 롯데쇼핑, 롯데웰푸드, 롯데칠성음료, 호텔롯데 등으로 KB증권의 관련 실적은 2277억원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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