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딜사이트 이세정 기자] "그 어느 때보다 이순신 장군의 정신, 리더십이 절실합니다."
지난 6일 오전 현대차그룹 신년회에서 새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정의선 회장은 자못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재계에서 소문난 '이순신 열성팬'인 정 회장은 종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을 언급해 왔지만, 이번에는 유독 무겁게 와닿았다.
현대차그룹은 2023년부터 본사가 아닌 현장에서 타운홀 미팅 방식으로 오프라인 신년회를 개최하고 있다. 임직원들과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소통하고, 경영 비전과 목표를 한층 명확하게 전달하겠다는 의도다.
정 회장이 지난 3년간 내놓은 새해 화두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위기'다. 정 회장은 매년 "글로벌 경기가 악화되고 우리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심화되고 있지만, 위기를 두려워 말고 이겨내자"며 당부해 왔다.
올해는 예년과 다른 분위기가 감지됐다. 정 회장은 약 5분간 진행된 짧은 인사말에서 총 14번의 '위기'를 언급했다. 현대차그룹 주요 C레벨과 함께한 좌담회까지 포함하면 그는 무려 20번이나 이 단어를 반복했다. 위기론이 아닌 진짜 위기인 것이다.
엄살이 아니다. 안 그래도 경기가 침체된 상황인데 '비상계엄 사태'라는 정치적 리스크로 위축된 내수심리는 좀처럼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다. 대외적인 여건은 더욱 암울하다.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유례 없는 보호무역주의와 친환경 정책 축소를 예고하고 나섰다. 현대차그룹이 미국 조지아주에 전기차 전용 신공장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를 건설하는 대가로 약속 받은 보조금을 못 받을 것이라는 우려는 기우가 아니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현대차그룹이 2022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 연속 기록 중인 글로벌 판매 3위 명패를 머지않아 일본 완성차 연합군에 뺏길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도 적지 않다. 일본 2위 업체인 혼다와 3위 닛산은 2026년 합병을 공식화했는데, 2023년 말 판매 기준 현대차그룹을 웃돈다. 현대차그룹이 완성차 판매 목표량을 2년째 낮춰 잡고 있다는 점은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정 회장이 비유한 대로 '퍼펙트 스톰'(초대형 경제위기)에 빠졌다.
정 회장은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을 타개할 해법으로 이순신 장군을 뽑았다. 1592년 왜군이 침략한 조선은 무능한 왕(선조)과 전란에도 연일 계파 싸움이 벌어지는 조정 탓에 건국 200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 이순신 장군은 첫 출전인 옥포해전부터 '학익진 전술'로 왜군을 섬멸한 한산도대첩 등 수많은 전쟁을 치뤘지만, 주군과 동료(원균)의 시기질투 속에 파직과 옥중 생활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자신이 처한 상황과 주어진 사명에 집중했다. 원균의 패배로 다시 전장으로 향한 이순신 장군에게 남은 것은 12척의 배 뿐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치밀한 준비와 뛰어난 지략을 바탕으로 솔선수범하며 연승했고 명언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을 남겼다.
정 회장 역시 올 한해 전쟁에 임하는 각오를 세웠다. 지난해 역대급 실적을 기록했다고 올해도 잘 될 것이라는 낙관주의는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작정 잘 버텨보자는 수세적인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현대차그룹이 올해 내수 투자로 창사 이래 최대 규모인 24조3000억원을 투입하기로 결정한 배경에도 위기를 기회로 바꾸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담겼다.
현대차그룹 앞에 놓인 현실이 녹록치 않다는 점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차그룹에 내재된 위기 극복의 DNA를 알고 있다. 자동차 불모지에서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받는 기업으로 성장했을 뿐 아니라 이제는 전동화와 수소, 도심항공모빌리티(UAM), 로보틱스 등 미래 모빌리티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정 회장은 내년 1월 또 다른 현장에서 신년회를 열고 올해를 되돌아 볼 것이다. 현대차그룹이 이순신 장군의 무패 신화처럼 승전보를 울리길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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