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대전환과 인공지능(AI) 기반의 4차 산업 혁명이 가속화되면서 반도체 업계도 패러다임 전환(시프트)가 본격화 되고 있다. 미중 패권 전쟁과 글로벌 공급망의 대전환 속에서 글로벌 반도체 시장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30년 동안 두 번의 패러다임 변화에 성공적으로 대응하면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일본 소니가 지배하던 아날로그 TV 시장에서 삼성전자가 세계최초로 디지털 TV를 출시하면서 소니를 꺾고 TV시장을 지배했다. 아날로그폰 시대에는 노키아가 1위 였지만 애플이 시장을 바꾸면서 스마트폰 시대에 애플-삼성 2강 구도를 만들었다. 하지만 AI 시대가 오면서 반도체 시장의 패러다임 전환에 대응하지 못하면서 SK하이닉스에게 시장 선두 자리를 내줬다. 앞서가는 SK하이닉스와 추격하는 삼성전자가 시장 선두 자리를 놓고 치열한 2라운드가 시작되고 있다. [편집자주]
[딜사이트 김민기 기자] 챗 지피티(ChatGPT)의 등장으로 본격적인 인공지능(AI) 시대가 열리면서 반도체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 과거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미세화를 통한 원가절감과 대량생산이 화두였다면 최근에는 AI 시대에 필수적인 메모리칩인 고대역폭메모리(HBM)를 필두로한 패키징 기술과 고객 맞춤 제품 생산이 대세가 되고 있다.
그동안 언더독(underdog)이였던 SK하이닉스는 반도체 패러다임 전환시기에 전략적 민첩성을 통해 빠른 의사결정으로 HBM 선두 주자로 나서고 있다. 삼성전자가 격차를 좁히기 위해 HBM3E, HBM4 등 세대가 바뀔 때마다 먼저 제품 양산을 노리고 있지만 한번 벌어진 격차를 줄이긴 쉽지 않은 상태다. 이에 6세대인 HBM4 시장을 두고 삼성전자의 반격과 이를 막으려는 SK하이닉스의 치열한 기싸움이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내년에 출시되는 HBM4 베이스 다이(base die, 로직 다이) 생산과 어드밴스드 패키징 기술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대만 TSMC와 협력 중이다. 반면 삼성전자는 HBM4의 베이스 다이 제작에 4㎚(나노미터) 파운드리 공정을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SK하이닉스와 TSMC가 12나노와 5나노 공정을 병행하기로 하면서 4나노로 반격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 하반기 양사는 5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 제품인 'HBM3E 12단'을 두고 누가 먼저 엔비디아의 퀄테스트(품질 검증)을 통과할 지를 두고 경쟁을 벌이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이미 HBM3E 8단은 엔비디아에 공급 중이지만 12단은 3분기나 4분기 초 양산을 준비 중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2월 SK하이닉스보다 먼저 업계 최초로 36GB(기가바이트) HBM3E 12단을 구현한 만큼 SK하이닉스보다 먼저 퀄 통과를 이뤄 격차를 줄이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삼성전자가 HBM3E 퀄 통과를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SK하이닉스를 제치긴 쉽지 않다는 평가다. 연내에는 삼성전자가 HBM3E 8단, 12단 모두 퀄 통과가 가능할 것으로 전망되지만 본격적으로 공급이 이뤄지는 것은 내년은 돼야 한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엔비디아가 HBM 수요 감당을 위한 공급망 다변화를 위해 삼성 물량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지만 기존 SK하이닉스보다 갑자기 삼성전자의 물량을 늘리기도 쉽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업계 한 관계자는 "엔비디아가 안정성 면에서 이미 신뢰를 쌓은 SK하이닉스의 HBM3E 제품을 블랙웰 칩 시리즈에 적용할 것으로 보인다"며 "삼성전자는 일단 HBM3 제품부터 기존의 H100이나 중국 시장용 플래그십 AI 칩 등에 적용하면서 안정성 테스트를 한 후 메인 제품에 HBM3E 제품을 넣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이규복 한국전자기술연구원(KETI) 연구부원장도 "고객사 입장에선 안정성을 따질 수밖에 없어 삼성전자가 퀄을 통과하더라도 납품 물량이 급격히 증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역전을 노리는 건 HBM4부터다. HBM4부터는 D램을 쌓아 만드는 HBM의 가장 밑단 '베이스 다이'를 파운드리 공정에서 제조한다. 그래픽처리장치(GPU)와 HBM을 연결하는 베이스 다이의 역할이 중요해지면서 삼성전자에게도 기회가 생긴다. 베이스 다이는 설계와 파운드리 역량이 핵심인데, 삼성전자는 이미 자체적으로 둘을 하고 있다. 메모리와 파운드리 기술을 모두 확보하고 있는 종합반도체 회사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HBM4에서는 SK하이닉스를 넘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SK하이닉스도 HBM4부터 TSMC 선단 공정을 활용해 최선단 로직 칩과 HBM을 결합한 세계 최고의 AI 솔루션을 시장에 공급하겠다는 계획이다. 특히 TSMC가 세계 1위 파운드리 회사인만큼 다양한 설계자산(IP)를 가지고 있어 고객사 요청에 따라 베이스 다이에 메모리 컨트롤러, 캐시 등의 기능 추가해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할 전망이다. 이미 형성된 엔비디아-SK하이닉스-TSMC로 이어지는 연합군의 고리가 깨지지 않게 구조적 관성에 머무르지 않고 지속적인 혁신과 투자로 선두자리를 공고히 하겠다는 계획이다.
앞선 업계 관계자는 "HBM이 빵이라고 하면 TC본더와 같은 장비는 빵을 굽는 기계고, 빵의 재료가 되는 것은 웨이퍼단의 설계 공정"이라며 "HBM4부터는 베이직 다이를 설계할 때부터 HBM에 최적화하기 위해 양사의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SK하이닉스는 TSMC와의 협업을 통해 최고 성능의 HBM4를 개발하는 것은 물론, 글로벌 고객들과의 개방형 협업에도 속도를 낼 것으로 전망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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