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배지원 기자] 반도체 대장주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바라보는 증권가의 시선이 달라지고 있다. 오랜 기간 메모리 반도체 업종의 표준 밸류에이션 지표로 통했던 PBR(주가순자산비율) 대신 PER(주가수익비율)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15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최근 증권사 리서치센터를 중심으로 메모리 반도체 기업을 기존처럼 자산가치보다 안정적인 이익 창출력을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분석이 확산되고 있다. 과거 메모리 반도체 산업은 경기 사이클에 따라 실적 변동성이 극심했던 만큼, 이익보다 자산가치를 반영하는 PBR이 핵심 잣대로 활용됐다. 하지만 AI 시대 핵심 메모리로 꼽히는 HBM(고대역폭메모리)이 시장 중심으로 부상하면서 산업 구조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 양사의 주가는 최근 1년간 가파른 상승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14일 종가 기준 삼성전자는 29만6000원, SK하이닉스는 197만원을 기록했다. 다만 기존 PBR 기준으로는 이미 역사적 고점 수준에 근접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시장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PBR이 지난해 기준 4배를 웃돌면서 과거 메모리 업황 피크 구간과 유사한 수준까지 올라온 것으로 보고 있다. 기존 논리대로라면 추가 상승 여력을 설명하기 어려워진 셈이다.
밸류에이션 패러다임 변화의 핵심 배경으로는 HBM의 등장에 따른 수요 구조 변화가 꼽힌다. 과거 범용 D램은 수요를 예측해 미리 생산하는 방식이었다. 업황 둔화 시 재고가 급증했고 가격 폭락과 이익 감소가 반복됐다. 메모리 업종이 대표적인 경기순환주로 분류됐던 이유다.
반면 HBM은 구조가 다르다. 엔비디아 등 빅테크 고객사 주문에 맞춰 생산하는 사실상 맞춤형 제품에 가깝다. AI 서버 투자 확대와 추론 수요 증가가 이어지면서 기존 PC·스마트폰 교체 수요 중심의 경기 민감 구조와는 다른 흐름을 보이고 있다. 재고 리스크도 상대적으로 낮다. 시장에서는 이 같은 구조 변화가 메모리 업종의 실적 안정성을 과거보다 크게 높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이러한 논리를 공식적으로 제기하는 보고서도 잇따르고 있다. 가장 먼저 문제를 제기한 곳은 SK증권이다. 한동희 연구원은 지난해 11월 SK하이닉스를 기존 PBR이 아닌 PER 기반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분석을 내놓으며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지난달 KB증권 역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에 PER 적용이 적절하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간했다. 15일 KB증권은 SK하이닉스에 대해 올해 2분기 영업이익이 시장 컨센서스를 13% 이상 웃도는 어닝 서프라이즈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하며 목표주가를 기존 280만원에서 300만원으로 상향 조정했다.
한동희 연구원은 최근 'P/E의 시대'라는 제목의 리포트를 다시 내고 "메모리 산업은 지금까지 거시경제 흐름을 벗어난 적이 없었지만 AI 시대 들어 수요·공급 구조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며 "PER 기준으로 글로벌 AI 기업들과 직접적인 밸류에이션 비교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현재 시장에서 제시되는 목표주가도 기존보다 크게 높아진 상태다. SK증권은 삼성전자 목표주가로 50만원, SK하이닉스 목표주가로 300만원을 제시하고 있다. 현재 주가인 삼성전자 29만4500원, SK하이닉스 197만원과 비교하면 추가 상승 여력이 상당하다고 보고있다.
PER 기준으로 보면 저평가 논리는 더욱 뚜렷해진다. 지난해 실적 기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PER은 각각 45배, 33배 수준으로 높은 편이다. 하지만 올해 예상 실적을 반영한 12개월 선행 PER은 각각 6배, 5.2배 수준까지 낮아진다. 글로벌 AI 관련 기업들과 비교하면 여전히 낮은 밸류에이션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노근창 현대차증권 연구원도 지난 13일 '수요의 본질 변화로 밸류에이션도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이름의 보고서를 발간했다. 노 연구원은 PBR 기준 목표주가와 PER 기준 목표주가를 산술 평균해 삼성전자 목표 주가를 34만원으로 제시했다. SK하이닉스는 265만원을 목표주가로 내놨다. 노 연구원은 "기존의 PBR 밸류에이션이 회사의 실적 개선속도와 규모를 충분히 반영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했다"며 "다만 PER만 적용하기에는 기존 질서를 바꾸는 AI 혁신이 생산 기술 제약과 제도적인 규제 등으로 인해 언제든 작은 캐즘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시장에서는 2026~2027년 HBM 가격 인상 가능성과 장기 공급계약 확대, 공급 부족 지속 등을 감안할 경우 향후 EPS(주당순이익) 상향과 함께 추가적인 리레이팅이 가능하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특히 AI 산업 내 핵심 공급망 역할이 강화되면서 단순 메모리 업체가 아닌 AI 인프라 기업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다만 반론도 존재한다. AI 투자 사이클 둔화나 HBM 공급 확대가 현실화될 경우 현재의 이익 안정성 논리가 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다. 일각에서는 PER 적용 논리가 최근 주가 상승을 정당화하기 위한 사후적 해석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결국 시장의 새로운 평가 기준이 안착하기 위해서는 실제 실적과 현금흐름을 통한 검증 과정이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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