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은 더 이상 단순한 기계가 아니다.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 국가 안위와 경제 주권을 지킬 전략 자산이자, 꺼져 가는 제조업에 다시 불을 지필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글로벌 로봇 전쟁의 골든타임을 사수할 마지막 승부수는 결국 낡은 규제를 걷어낸 '특구(特區)'에 있다. 이에 딜사이트는 테슬라 '옵티머스'와 맞붙을 현대차그룹 '아틀라스'부터 생존을 위해 로봇 기업으로 변신하는 부품사의 사투, IPO(기업공개)와 동반성장펀드로 이를 뒷받침하는 자본의 흐름까지 치열한 로봇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을 생생하게 담아 본다. [편집자주]
[딜사이트 이세정 기자] 이재명 정부가 이르면 오는 6월 총 150조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를 공식 출시하는 가운데, 현대자동차그룹(현대차그룹)이 강력한 참여 의지를 내비치며 '퍼스트 무버' 행보를 가속화하고 있다.
독특한 대목은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시선이 단순한 펀드 자금 확보나 단기 수익이 아닌, '로봇 밸류체인(가치사슬) 구축'이라는 더 큰 그림을 향해 있다는 점이다. 이는 대한민국 산업의 근간을 지탱해 온 '기계·제조' 중심의 지형도를 '지능형 로보틱스'로 완전히 탈바꿈시키겠다는 거대한 승부수로 읽힌다.
◆ 금융위 문 먼저 두드린 현대차…로봇 중심 국가 체질 대전환
금융당국과 재계 등에 따르면 정부가 국민성장펀드 조성의 얼개를 짜기 시작한 직후 현대차그룹이 가장 먼저 금융위원회를 찾는 등 발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통상적인 펀드 출범 시 기업들이 자금 지원 규모나 금리 혜택을 문의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행보라 할 수 있다.
내부 사정에 정통한 고위 관계자는 "정 회장이 직접 자신의 최측근 인사를 국민성장펀드 태스크포스(TF)와 접촉시켰다"며 "타 기업들이 1호 투자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이는 것과 달리, 현대차그룹은 정부의 적극적인 행정적·제도적 백업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핵심 공약인 국민성장펀드는 정부를 비롯해 금융회사, 연기금, 산업계, 벤처·창업업계 등이 모여 향후 5년간 150조원을 전략 투자하는 '메가 프로젝트'다. 글로벌 각국이 첨단산업의 패권을 쥐기 위해 말 그대로 '투자 전쟁'에 나선 만큼 한국도 뒤쳐지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담겼다.
관계자에 의하면 현대차그룹은 국민성장펀드에 '국가 산업 체질의 대전환'을 제시한 것으로 확인된다. 과거 대한민국이 조선, 철강, 자동차 등 중후장대형 산업으로 성장했다면, 앞으로는 인공지능(AI)과 결합한 로보틱스가 그 자리를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 역시 해당 펀드 자금의 약 5분의 1 수준인 32조원을 AI와 로봇 산업에 집중 투입해 이러한 변화를 뒷받침할 계획이다.
예컨대 현대차그룹은 완성차 산업에서 구축해 둔 촘촘한 밸류체인을 로봇 산업으로 이관시키고, 한국이 글로벌 로봇 산업 주류(메인스트림)에 진입할 수 있도록 이끌겠다는 구상이다. 이는 정 회장이 그리는 로봇 사업의 비전이 현대차그룹의 기업 영리 추구를 넘어섰음을 의미한다.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 기술을 개발하더라도, 이를 실증할 공간(특구)과 규제 완화, 부품 생태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모래성'에 불과하다는 판단이 깔린 것으로 풀이된다.
◆ '로봇 심장' 다는 부품사…밸류체인 내재화·협력사 동반성장
현대차그룹의 실행 전략은 '로봇 밸류체인의 내재화'와 '협력사 동반성장'으로 축약할 수 있다. 현대차그룹이 미국 로봇 자회사인 보스턴다이나믹스를 통해 세계 최고 수준의 로봇 제어 기술을 확보한 만큼 이는 단순한 목표를 넘어 구체적인 성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보스턴다이나믹스가 개발한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는 올 초 개최된 'CES 2026'에서 최고 로봇상을 수상할 만큼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감속기나 서보모터 등 핵심 하드웨어 부품의 상당수는 여전히 해외 의존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나마 현대차그룹은 차세대 아틀라스가 양산되는 시점(2028년)에 맞춰 현대모비스의 액추에이터를 사용할 계획이지만, 현재 운영 중인 로봇개 스팟이나 휴머노이드 로봇 등은 해외 부품사 제품이 대다수 적용됐다.
현대차그룹은 국민성장펀드 자금을 활용해 국내 중소·중견 부품사들이 로봇 부품 기업으로 전환(피보팅)할 수 있도록 돕고, 이들이 만든 부품을 현대차의 로봇에 탑재하는 선순환 구조를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기업의 낙수효과를 유도하는 동시에 국가 제조업의 기초 체력을 '기계'에서 '첨단 로봇'으로 업그레이드하는 전략이다.
현대차그룹 협력사는 '내연기관의 종말'이 예고된 상황에서 6000여곳에 달하는 일감 소멸에 대한 우려를 해소할 수 있다. 아울러 로봇 중심의 사업구조를 확립하며 내연기관 부품사들이 로봇 정밀 부품사로 자연스럽게 전환될 수 있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
특히 로봇 산업은 수도권 뿐 아니라 대구(국가로봇테스트필드), 창원(기계·방산) 등 지역 거점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국민성장펀드가 목표로 하는 '지역 균형 발전'과도 정확히 맞아떨어진다는 게 지배적인 시각이다. 현대차그룹이 구상하는 로봇 밸류체인이 특정 지역의 '로봇특구'와 결합될 경우 연구개발(R&D)부터 부품 생산, 완제품 실증까지 한 곳에서 이뤄지는 클러스터가 탄생할 것으로 기대된다.
재계 관계자는 "정 회장이 미래차 시장에서 선제적인 투자로 글로벌 톱티어에 등극한 것처럼 로봇 시장에서도 '퍼스트무버'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며 "국민성장펀드라는 정부의 강력한 지원 사격과 현대차의 기술력이 결합할 경우 한국이 로봇 산업의 글로벌 허브로 도약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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