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김규희 기자]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분식회계 사건으로 유죄를 선고 받아 8년 여를 복역하고 난 후에도 명예회복을 위해 재심을 청구한 고재호 전 사장이 제시한 증거들은 크게 세 가지다. 공범으로 지목된 선임자가 무죄를 확정받아 원판결의 전제가 무너졌고, 당시 유죄의 핵심 증거가 됐던 임원들의 진술이 검찰 압박에 의한 허위였다는 게 주된 요지다.
하지만 이미 선고된 대법원 판결을 뒤집기 위해선 이러한 증거들이 모두 사실로 확인돼야 하고, 그것이 재심 청구 요건이 되는 새롭고 명백한 증거여야 한다는 게 법조계 전언이다.
◆ 분식의 시작점은 무죄…계승자는 유죄
22일 업계에 따르면 고 전 사장의 법률대리인 법무법인 LKB평산과 대륙아주는 최근 서울고등법원에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등에 대한 재심을 제출했다. 재심 요구의 핵심 근거는 세 가지다. 공범으로 기소된 남상태 전 사장의 무죄가 확정된 점, 원판결 핵심 증언의 허위성 입증, KDB산업은행 지배구조 하에 분식 회계가 불가능한 구조였다는 점 등이다.
이번 재심 청구의 가장 강력한 근거는 공범 남상태 전 사장의 무죄 확정이다. 2015년 수사 당시 검찰(부패범죄특별수사단)은 대우조선해양의 분식회계가 남 전 사장 재임 시기(2006~2012년)에 시작되어 고 전 사장 재임 시기(2012~2015년)까지 이어진 연속된 단일 범죄라고 규정했다.
고 전 사장의 1심 재판부는 이 프레임을 받아들였다. 고 전 사장이 분식을 직접 지시하지 않았더라도 '남상태 시절부터 밀려온 분식을 인지하고도 이를 바로잡지 않았다'는 소위 미필적 고의를 인정해 유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이 대전제가 고 전 사장 판결 이후 2년이 지나 진행된 남 전 사장의 재판에서 무너졌다. 법원은 남 전 사장의 분식회계 혐의에 대해 "회계 기준에 대한 이해 부족이나 과실을 넘어 의도적인 회계 분식으로 단정하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고 해당 판결은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분식의 시작으로 지목된 행위가 무죄가 되면서 이를 계승했다는 이유로 유죄를 받은 고 전 사장의 판결은 논리적 근거를 상실했다는 지적이다. 시작이 없었는데 계승만 유죄가 된 건 모순이라는 얘기다.
심지어 고 전 사장의 후임이었던 정성립 전 사장은 동일한 사안에 대해 검찰 수사 단계에서 아예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동일한 회계 처리를 두고 전임자(남상태)와 후임자(정성립)는 처벌을 피하고 중간에 재임했던 고 전 사장만 5조원대 분식회계의 주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상황이 됐다.
◆ "검찰 강압에 허위 진술했다"…핵심 증인 6명의 번복
유죄 판결의 결정적 증거였던 핵심 임직원들의 진술도 허위였다는 새로운 증거가 제출됐다. 원판결은 당시 이 모 CFO(부사장), 박 모 경영관리팀장 등 핵심 실무자 6명의 진술을 유죄의 핵심 근거로 삼았다. 하지만 이들은 최근 작성한 진술서와 사실확인서를 통해 "당시 검찰의 강압적인 수사 분위기 속에서 사실과 다른 취지로 진술했다"고 기존 입장을 전면 번복했다.
이 모 부사장은 "1조원대 분식을 맞추라는 지시를 한 바 없다"고 기존 검찰 진술을 부인했다. 박 모 팀장은 검찰이 주장한 2008년 2029억원의 분식이 아니라 오히려 264억원의 이익이 발생했으며 4개년간 누적 341억원의 역분식이 있었다고 얘기했다. 검찰이 수조원대 분식의 시발점으로 삼은 논리와 배치되는 대목이다.
조 모 전무는 해양플랜트 사업의 특수성을 강조했다. 그는 "해양플랜트 계약은 확정도급계약과 정산계약을 구분하기 어렵고 설계변경 조항이 없는 계약을 본 적이 없다"며 법원이 이를 잘못 해석해 유죄를 인정했다고 했다.
고영렬 부사장과 정성립 사장, 김 모 상무 역시 "대우조선해양은 산업은행이 통제하는 공기업과 유사한 지배구조"라며 "대표이사가 독자적으로 조 단위의 분식회계를 지시하거나 실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이처럼 원판결의 유죄 근거가 된 핵심 증인 6명의 진술이 모두 새로운 증거를 통해 허위였음이 증명됐다는 게 고재호 사장 측 주장이다.
◆ KDB산업은행의 통제…CEO 단독 범행 구조적 불가능
고재호 사장 측은 KDB산업은행의 절대적인 지배구조 하에서 CEO 단독 범행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2000년 워크아웃 이후 대우조선해양의 실질적 주인은 대주주인 산업은행이었다. 산업은행은 이사회 장악은 물론 재무부문장(CFO)과 재무·회계 실무진을 직접 파견해 자금 집행부터 회계 결산까지 모든 과정을 통제했다.
이러한 구조적 통제는 객관적 자료로도 증명된다. 고 전 사장 측이 제시한 문건에는 설계변경이 계약 수익으로 인정될 가능성을 명시하고 있다. 안진회계법인조차 미확정 사항에 대해 확정시점에 수익과 비용을 모두 반영하는 입장을 전달한 바 있다. 손실을 의도적으로 누락한 분식이 아니라 회계 기준에 따른 처리 시점의 문제였음을 시사하는 지점이다.
2008년 말 경영진이 인식한 손익 현황을 보여주는 자료를 통해서는 검찰이 얘기하는 대규모 손실 은폐와는 거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산업은행의 철저한 통제 하에 집행된 성과급 지급 역시 회사가 대규모 분식을 숨기고 있었다면 불가능했을 승인 사항이었다. 이 증거들은 모두 분식회계가 아닌 산업은행의 통제 하에 이뤄진 정상적인 경영 활동 및 회계 처리였음을 뒷받침한다.
법조계 관계자는 "공범 관계에 있던 인물의 무죄 확정은 재심 요건이 되는 새롭고 명백한 증거로 인정될 가능성이 있다"면서 "원판결의 전제가 된 사실관계가 흔들리는 만큼 법원이 실체적 진실을 다시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새로운 눈으로 시장을 바라봅니다. 딜사이트 무단전재 배포금지
Ho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