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범찬희 기자] 한국과 달리 신정을 쇠는 일본인들에게 연말연시가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일본 교통의 중심인 도쿄역은 연말 마지막 날이면 이른 아침부터 신칸센을 타고 귀성길에 오르는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산가니치'(三が日)라 불리는 1월 1일부터 3일까지는 신년의 복(福)을 비는 세리머니가 이어진다. 우리나라의 떡국에 해당하는 조니(雑煮)라는 음식을 먹고, 가족과 함께 신사나 절을 찾아 새해의 안녕을 빈다.

하지만 이러한 소망과 달리 일본 열도는 갑신년 시작부터 쓰나미 경보가 울려 퍼졌다. 해맞이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1일 오후부터 일본 혼슈의 중서부에 위치한 노토반도 일대에 대형 지진해일이 예고됐다. 일본의 공영방송인 NHK 아나운서는 격양된 목소리로 '니겟테(도망가라)'를 외치며 지역 주민들의 피난을 독려했다. 간절한 호소에도 진도 7.6의 강진은 220여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신년 벽두에 일본인들에게 전해진 비보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대형재난에 이어 대형 화재까지 발생했다. 2일에는 도쿄의 관문인 하네다 공항에서 JAL(일본항공) 항공기와 해상보안청 소속 항공기가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해상보안청 항공기 탑승객 6명 중 5명이 사망했다. 해상보안청 항공기는 강진 피해 지역에 구호물자를 수송할 예정이었던 걸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불행 중 다행히도 JAL에 탑승한 승무원과 승객 379명은 전원 탈출에 성공했다.

자칫 수백명의 사상자를 낼 수 있었던 참사를 막은 JAL의 대처에 세계의 찬사가 이어졌다. 이례적으로 중국 언론까지 나서 '탈출의 교과서'라는 칭찬 릴레이에 동참했다. 외신들은 전원 탈출이 가능할 수 있었던 건 JAL 승무원들의 '90초 룰' 훈련이 잘 됐기 때문이라는 평가를 내놓았다. 짐을 포기하고 승무원들의 지시를 잘 따라준 승객들 또한 골든타임의 주역들이다.

90초 룰이란 지난 1967년 미국 연방항공국(FAA)이 모든 항공기 제조업체에 요구한 '항공 안전 매뉴얼'이다. 화재 등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비상탈출구 절반 이하만 사용해 90초 이내에 승객들을 기내에서 탈출시키는 규정이다. 당시 사고는 실제 상황인 만큼 90초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기는 했다. 하지만 최대한 해당 룰을 지키고 승무원과 승객이 함께 합심해 안전하게 위기 상황을 극복했다.

이러한 상황은 안전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JAL의 경영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JAL의 안전 제일주의는 CEO(최고경영자) 인사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지난 17일 JAL은 고객경험본부장인 돗토리 미츠코(鳥取三津子) 전무를 대표이사 사장을 발탁했다. 오는 4월부터 임기를 시작하는 돗토리 전무는 여성, 승무원, 단기대학(전문대) 출신이라는 천정을 뚫고 일본 제1국적기의 사령탑에 올랐다. 책상이 아닌 현장 일선에서 승객의 안전을 책임져 온 돗토리 전무의 경험을 경영일선에 반영하겠다는 JAL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신년 벽두부터 전해진 이웃나라의 소식을 접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한국의 인천이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화염이 솟구치는 상황에서 우리나라 국적기에 탑승한 승무원과 승객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을까. 승무원들이 매뉴얼대로 대응한다 한들 승객들이 과연 이를 잘 따를까.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짐 하나라도 챙겨나가겠다며 아등바등하는 사람은 없을까. 해외여행이 일상화된 요즘, 항공사의 매뉴얼 점검은 물론 승객들의 안전의식을 되돌아봐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