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조은비 기자] 호르무즈해협 봉쇄 여파로 선박 강재 절단 공정에 쓰이는 핵심 가스 '에틸렌' 수급에 비상이 걸린 가운데, 업계 1위 HD현대중공업이 가장 먼저 가동 중단 위기를 느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쟁사들이 동일한 재고로 버틸 수 있는 기간이 HD현대중공업에선 훨씬 짧게 소진되는 구조기 때문이다.
한 조선업계 관계자는 "HD현대중공업이 에틸렌 수급 위기를 가장 먼저 체감하며 정부 지원 요청을 주도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에틸렌 부족은 업계 전체의 문제지만, HD현중의 경우 같은 재고 수준이어도 소모하는 양이 다른 곳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없는 것을 있다고 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며 "조선업계가 에틸렌이 부족하다는 사실 자체는 반박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HD현대중공업이 위기를 가장 먼저 체감하는 이유는 규모에 있다. 울산 조선소는 여의도 면적의 3배에 달하는 약 630만㎡ 규모이며, 10개의 대형 건조 도크와 9개의 초대형 골리앗 크레인을 갖추고 있다. 단일 조선소 기준 국내 최대이자 세계 최대 규모다. 도크가 많고 건조 물량이 많을수록 에틸렌 소모 속도도 비례해 빨라진다. 반면 삼성중공업, 한화오션 등 경쟁사들은 상대적으로 건조 물량과 도크 수가 적어 에틸렌 소모 속도가 느린 만큼, 아직은 버틸 수 있다는 분위기다.
이러한 분위기를 읽은 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는 최근 산업통상자원부에 선박 건조에 필요한 절단용 에틸렌 물량 확보 요청을 공식 전달했다. 산업부는 지난달 13일 조선업계와 긴급 수급 점검 회의를 열고 기업별 단기 필요 물량을 파악했으며, 15일에는 한국석유화학협회, 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가 참여하는 화상 협의를 통해 단기 물량 공급 방안을 확정 지었다.
정부는 재외공관과 코트라 무역관 네트워크를 활용해 대체 수입선을 확보하고, 나프타 수입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대비용 지원 방안도 업계·관계부처와 협의 중이다. 협회는 4월2일 입장문을 통해 "국내 조선업계는 에틸렌 가스에 대해 사전에 일정 수준의 재고를 유지해 왔으며, 현재 주요 생산 공정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업계 내부 시각은 이 공식 입장과 온도 차가 있다. 2~3개월 수준의 비축분을 가지고 있지만 넉넉한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에틸렌이 끊기면 조선 공정 자체가 멈춘다. 선박에 사용하는 강재는 두께가 두꺼워 일반 절단 방식으로는 가공이 불가능하다.
조선사는 에틸렌을 활용해 화염 온도를 최대 1500도까지 끌어올린 뒤 철판을 절단하는데, 이 공정이 막히면 후속 모든 건조 일정이 연쇄적으로 지연된다. 한 조선업계 관계자는 "기존에 계약된 물량은 당장 문제가 없겠지만, 새로 받아오는 물량부터는 영향이 없지 않을 것"이라며 "그 시점도 회사마다 다 다르다"고 말했다.
에틸렌 가격도 폭등했다. 동북아 CFR 에틸렌 가격은 3월19일 기준 t(톤)당 1351달러를 넘어 2월 초 696달러 대비 약 두 배 수준으로 치솟았다. 한국은 나프타 크래커 중심 구조여서 중동산 원료 조달 차질이 에틸렌 원가 상승으로 직결된다.
국내 최대 에틸렌 생산업체인 LG화학도 지난달 23일 나프타 수급 차질이 현실화하자 전남 여수 NCC(나프타 분해시설) 2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조선업계에 에틸렌을 공급하는 석화 업스트림이 흔들리면서 조선사들의 조달 여건도 덩달아 악화되는 상황이다.
에틸렌을 정부가 지원한다고 해도, 조선사별 배분 기준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도 변수다. 한 조선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지원하기로 한 것은 사실이지만, 업체별 포션을 어떻게 나눌지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아직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 관계자는 "중동 사태가 몇 개월 지속되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점은 모든 업종이 똑같다"며 "현재로서는 큰 차질 없이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HD현대중공업이 에틸렌 수급 지원 요청을 주도했는지를 묻는 질문에는 "HD현중에 직접 물어봐 달라"며 답변을 피했다. 정부 지원 물량을 업체별로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 차등 지원이 이뤄지는지 등을 묻는 질문에도 끝내 구체적인 답을 내놓지 않았다.
기업마다 기존 계약 물량의 소진 시점도 다르고, 새로 조달해야 하는 원자재 물량에 영향을 받는 시기도 제각각이라 개별 기업의 위기 체감도 차이는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단기 수급 해소를 선언하더라도, 그것이 향후 2~3년간 이어질 초고밀도 건조 일정에 대한 리스크까지 걷어낸다는 의미는 아니다. 마스가(MASGA) 프로젝트의 성공적 이행을 위해서라도 에틸렌 공급원 다변화나 전용 비축 기지 구축 등 근본적인 공급망 안보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백점기 부산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는 "저장 물량으로 버티고 있지만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니다"라며 "조선업이 미국과의 전략 협력 산업으로 부상한 만큼, 에틸렌 수급 문제는 특정 기업의 문제가 아닌 국가 차원에서 관리해야 할 공급망 리스크"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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