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이상균 IB부장] 지난 4월 한국성장금융투자운용(성장금융)은 5개 출자사업에 7850억원을 출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가뜩이나 벤처캐피탈(VC) 업계에 돈맥경화 현상이 나타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와중이었기에 '가뭄에 단 비'라는 평가가 나왔다. 다만 환호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당시 성장금융의 출자사업을 총괄했던 조익재 전무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이번 출자사업 모펀드에 시중은행들이 유한책임투자자(LP)로 참여해 출자했다는 점이 특히 걱정스럽다. 추후 은행으로부터 투자확약서(LOC)를 받는 것도 작년과는 환경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 달라."
조 전무의 조언은 사실이었다. 5대 시중은행(KB국민은행, 신한은행, 우리은행, 하나은행, NH농협은행)을 포함한 다수의 금융회사들이 성장금융 모펀드에 투입한 금액은 무려 4200억원에 달했다. 총 출자액(7850억원)의 53.5%를 차지하는 규모다. 이는 이번 출자사업의 자펀드 GP로 선정돼도 시중은행을 유한책임투자자(LP)로 끌어들이는 것은 사실상 포기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VC 입장에서는 최근 들어 LP 풀(pool)이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악재가 아닐 수 없다. 은행LP가 떨어져나가면 일반기업들을 상대로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데 경기 불황 탓에 선뜻 투자확약서(LOC)를 발급해주는 곳이 많지 않다. 대규모 기업집단에서 기업형 벤처캐피탈(CVC) 설립을 늘리고 있다는 점도 악재다. 그렇다고 4000억원이 넘는 거액을 출자해준 은행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은 온당치도 않다.
다만 은행들이 자펀드가 아닌 모펀드에 거액을 출자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이 남는다. 얼마 전 만난 LP 관계자가 답을 줬다.
"은행에서 벤처출자 사업 담당은 규모도 작고 회사 내에서 그리 인정받지 않는 부서라서 인기가 높지 않다. 대부분 큰 사고 치지 말고 잘 지내다가 다른 부서로 옮기자는 생각을 갖고 일하는데 VC를 선정해 수백억원을 출자하라는 미션이 내려온다.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를 공부해가며 괜찮다 싶은 VC를 발굴해서 출자하려고 하는 찰나에, 갑자기 고위급이 특정 VC를 선정하라는 압력이 내려온다. 실무자 입장에서는 '고위급이 있어봐야 앞으로 3년이지'라는 생각에 명령을 묵살할까, 아니면 '후환이 두려우니 못 이긴 척 따르자'라는 생각에 갈등을 한다. 이렇게 VC 선정 과정에서 갖가지 압력과 이에 반발하는 일이 잦아지자 은행 내부에서 잡음이 많은 자펀드 선정하지 말고 속 편하게 모펀드에 출자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VC간 경쟁이 은행 내부의 알력 다툼으로 이어지면서 악순환이 발생한 것이다. 정책자금을 다루는 LP 관계자는 의미심장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모두들 우리 LP를 갑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힘이 없다. 사실 VC 관계자들이 인맥, 학맥, 지연 등 네트워크가 더 화려하다. 출자사업 과정에서 미심쩍은 부분이 조금만 발생해도 온갖 인맥을 동원해 국회의원까지 나서게 할 정도다. 권력을 쥐고 있는 건 LP가 아니라 오히려 VC다."
출자사업을 놓고 벌이는 VC간 과열 경쟁은 여기저기서 부작용을 양산한다. 갖가지 음해성 투서가 난무하는 것은 기본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정책자금을 다루는 LP들은 선정 과정에서 외부 위원을 최대한 영입해 뒷말이 나오지 않도록 만반의 채비를 한다.
이런 제살깎기 식 비방전은 업계의 성장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LP 입장에서는 이런 잡음이 발생할수록 정성평가보다는 정량평가에 더욱 의존하기 마련이다. 즉, 잠재력을 지닌 중소형 VC보다는 화려한 트랙레코드를 갖추고 잡음이 나올 우려도 적은 대형 VC에게 출자를 몰아준다는 얘기다. 부익부 빈익빈의 심화다. 요즘 들어 중소형 VC들의 펀드레이징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고 하소연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VC 스스로 자충수를 둔 측면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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