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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휘둘린 시장, 트리거의 시작
이상균 산업2부장
2022.10.27 09:08:15
'김진태'발 레고랜드 사태가 던지는 교훈은
이 기사는 2022년 10월 26일 08시 13분 유료콘텐츠서비스 딜사이트 플러스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딜사이트 이상균 산업2부장] 건설사에서 오랫동안 해외사업을 전담해오던 임원과 얘기를 나누던 중 가장 큰 리스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었던 적이 있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장기간 공을 들였던 해외 발주처의 관계자가 돌연 교체되는 것"이라며 "특히 후진국의 경우 정권 교체 여부와 관계없이 신임 담당자가 임명되면 기존 정책을 손바닥 뒤집듯이 바꿔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수주영업을 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속이 타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후진국의 이 같은 행태에 혀를 찰 만도 하지만 우리라고 다를 바가 없다. 테마파크 '레고랜드' 사업 주체인 강원중도개발공사(GJC)가 PF 대출 조달을 위해 설립한 특수목적회사(SPC) '아이원제일차'의 자산담보부 기업어음(ABCP) 2500억원의 만기가 돌아왔지만 김진태 강원지사가 이를 갚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채무보증을 약속했던 강원도가 발을 빼면서 아이원제일차는 결국 10월초 최종 부도처리됐다.


채무보증 약속을 뒤집은 것에 대해 강원도는 "2050억원의 보증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밝혔지만 자본시장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돼버렸다. 한마디로 국가를 믿지 못하는 시장이 된 것이다. 지방자치단체는 서울이든, 강원도든 모두 동일한 정부기관으로 최고등급의 신용등급(AAA)을 보유한다. 정부기관이 빚을 갚겠다는 약속을 하루아침에 어길 수 있다는 충격이 시장을 강타한 것이다.


정부기관이 이럴 진데 이보다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들의 자금조달이 제대로 이뤄질 리가 만무하다. 건설사 중 최고 신용등급을 보유한 현대건설조차 회사채 금리를 8%로 올렸지만 발행에 실패했다. 롯데건설은 10%, 태영건설은 12%까지 올렸지만 역시나 발행이 무산됐다. 상대적으로 리스크 높은 CP와 ABCP는 아무리 높은 금리로 발행을 해도 기관투자자들이 거들떠도 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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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 한 지방단체장이 자본시장에 불을 지피면서 정부는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지난 23일 부랴부랴 대책을 내놓았다. 20조원 규모의 채권시장안정펀드를 조성하고 회사채와 CP, ABCP를 매입하기로 했다. 산업은행과 기업은행, 신용보증기금 등은 회사채와 CP 매입규모를 8조원에서 16조원으로 늘리기로 했다. 한국증권금융 재원을 통해 일시적으로 유동성이 부족한 증권사에는 3조원을 공급하기로 했다.


김진태 지사의 무책임한 결정 탓에 시장이 치루는 대가는 어마어마하다. 기준금리 인상으로 자금조달 비용이 급증한 상황이었는데 이제는 비용 증가가 아니라 조달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 돼버렸다. 엄밀히 말해 최근 건설사들이 유동성 위기에 시달리는 것도 김 지사가 트리거(방아쇠) 역할을 해주면서 시장의 불안감을 증폭시켰기 때문이다. 정부 대책으로 급한 불을 껐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수습이 됐다고 볼 수도 없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위기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정부가 비상시에 써야 할 카드를 너무 빨리 소진했다는 아쉬움이 강하게 든다.


김진태 지사가 왜 이 같은 결정을 내렸는지조차 의문투성이다. 김 지사는 레고랜드 사업을 반대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강원도를 수차례 압박한 인물이다. 지난 2018년 1월에는 강원도청 브리필룸에 기자회견을 열어 "올해 3월말까지 레고랜드 테마파크 시공계약 체결이 무산되면 강원도는 사업 중단을 포함해 사업 원점재검토와 지사직을 걸겠다고 누차 공언한 최문순 지사는 사퇴해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다.


시장경제가 정치인의 말 한마디에 흔들리는 건 후진국에서나 볼법한 행태다. 안타깝게도 2022년에 이런 믿기지 않는 행태가 나타나고 있다. 김 지사가 자본시장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이라도 있었다면 이런 불필요한 혼란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개인에서 비롯된 리스크 치고는 호된, 그리고 굳이 지불하지 하지 않아도 될 비용을 우리가 치루고 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김 지사의 이번 결정은 자본시장의 한 획을 그었다는 점에서 그도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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