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이진철 편집국장] 10년 전 케이블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주인공 덕선이 아빠로 등장한 성동일의 직업은 은행원이었다. 한일은행에 다니는 건실한 가장이지만 친구에게 잘못 서준 보증으로 인해 온 가족이 가난한 셋방살이를 하는 것으로 드라마 스토리가 전개된다. 덕선이 아빠가 은행원의 전문성을 살려 빚보증 친구의 냉철한 신용분석만 제대로 했다면 집안이 풀썩 주저않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덕선이 아빠가 다니는 한일은행을 비롯해 상업은행, 조흥은행은 국내 금융을 대표하는 간판 은행들이었다. 이들 은행은 산업화 시기 중화학공업, 수출무역, 도심 상공업 등 기업대출을 통해 자금을 공급하며 경제 발전의 한 축을 담당했다. 그러나 외환위기가 기업대출의 핵심 인프라 기능을 무너뜨렸다. 부실기업과 과잉대출이 누적되면서 구조조정을 피할 수 없었다. 한일은행과 상업은행은 통합돼 지금의 우리은행으로 이어졌고, 조흥은행은 이후 신한금융지주에 인수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기업대출의 위험성을 간파한 은행들이 선택한 길은 '안정'이었다. 기업대출 리스크를 경험한 은행들은 담보 중심의 가계대출로 빠르게 이동했다. 은행 창구에서 담보만 확인하면 비교적 손쉽게 돈을 빌려주는 주택담보대출에 집중하면서 예금금리 대비 2% 안팎의 대출 마진을 안정적으로 챙기며 지금 대형은행들은 연간 수조원의 순이익을 내고 있다.
최근 시장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대기업이 벌어들이는 막대한 달러 자금을 원화로 환전해 국내에 들어오려 해도, 국내은행이 이를 적극적으로 유치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지자체 금고나 연기금 주거래은행 유치를 위해 금리 경쟁까지 벌이던 은행들이 거액 예금을 마냥 반기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은행의 요즘 상황을 보면 돈을 굴릴 곳이 마땅치 않다. 예금은 늘어나는데 대출이 따라주지 않으면 은행은 역마진 손실 위험에 직면하는 게 현실이다.
이재명 정부의 부동산 규제 강화로 주택담보대출은 더 이상 과거처럼 늘어나기 어렵다. 담보가 확실하고, 리스크는 낮으며, 수익은 안정적인 가계대출, 그중에서도 주택담보대출로 돈을 벌던 시대가 저물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요즘 '생산적 금융'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생산적 금융이란 단순히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을 넘어, 자금이 실물경제의 생산성과 혁신으로 이어지도록 배분하는 금융을 의미한다. 부동산과 같은 자산시장에 머무는 돈이 아니라, 기업의 투자와 기술 개발, 일자리 창출로 연결되는 자금 흐름이다.
하지만 삼성전자와 같은 신용이 확실한 대기업은 자본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기 때문에 은행 대출에 대한 의존도가 낮다. 남은 영역은 성장을 위해 대출이 필요한 중소·벤처기업인데 리스크가 높다.
결국 대출을 담당하는 은행원이 기업의 재무제표를 읽는 능력은 기본이고, 산업의 흐름을 이해하고 기술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AX(인공지능 전환) 시대를 맞아 은행원들의 단순한 창구 업무나 영업은 빠르게 줄어들어 은행지점은 통폐합되고 구조조정 위기에 노출돼 있다. 과거 은행원의 경쟁력이 영업력과 상품 판매 능력에 있었다면 생산적 금융 시대에는 기업분석·리스크관리·구조화금융 같은 고부가가치 영역에서 전문성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생산적 금융 시대에서 은행원은 대출의 승인 여부를 결정하는 '심사자'에서 기업의 성장 가능성을 보고 자금을 집행하는 '투자자'로 역할을 바꿔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한 기업금융 업무에서 발전된 신용평가 시스템, 데이터 축적은 물론, 조직문화도 더 큰 성과를 위해 리스크를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
은행과 그 조직에 몸담은 은행원은 기로에 서 있다. 주택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던 시대에서 생산적 금융으로의 전환은 은행과 은행원 모두에게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자 새로운 기회다. 기술을 보고, 데이터를 읽고, 불확실성을 대출에 반영하는 능력이 성장의 성패를 가르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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