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김현호 기자] 150조원 국민성장펀드 조성, 퇴직연금의 벤처투자 허용 등 숫자는 커졌다. 모수가 커지니 유동성 공급에 기대가 모인다. 그러나 현장의 온도는 다르다. 규모가 커진다고 마냥 좋을 수는 없다고 한다. 자금의 총량을 말하기 전에 어떻게 쓰일 것인지, 어디에 쓰여야 하는지 되묻는다.
펀드가 비대해지면 체크사이즈가 커지고 소화 가능한 스타트업 풀은 줄어든다. 초기·씨드 기업은 긍정 평가를 받아도 사이즈가 맞지 않아 테이블 밖으로 밀려난다. 전략적 투자자(SI) 찾기는 더 깊은 골이다. 거버넌스 부담은 무겁고 세제 유인은 약하며 경기 불확실성은 길다. 기존 SI는 더 보수적으로 변한다. 결국 투자는 익숙한 곳, 검증된 대형사에 몰린다.
총량 확대의 선의가 애먼 돈을 만들 수 있다. 의도가 선명할수록 설계가 섬세해야 하는데 반대다. 같은 깔때기에 다른 물을 붓는다. 초대형과 씨드를 한 그릇에 담아 속도·형평·품질이라는 서로 다른 목표를 한 번에 달성하라 주문한다. 결성액은 늘어도 집행은 늦고 지표는 채워도 회수의 질은 흐릿하다.
그릇을 나누자. 초대형·중형·씨드로 트랙을 분리하고 목표와 룰을 다르게 설계하자. 돈을 움직이는 장치도 넣자. SI가 투자확약서(LOC)를 내면 모펀드가 즉시 1대 1로 자동 매칭하는 규칙을 세우자. 일부 초기 포트폴리오에는 정책 자금을 활용해 부분 손실 보전 캡 같은 얇은 완충 장치를 얹자. SI의 첫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브레이크를 밟자. 한 출자 사업에서 하우스별 배정 상한을 명시하고 대형–중소형 공동 운용 트랙을 제도화하자. 성과 평가는 얼마를 모았는지에서 어디에, 어떻게 집행했는지로 축을 옮기자. 후속투자, 산업·지역 분산도, 민간 매칭 비중, 회수 지표를 정례 공개하면 숫자는 실력이 된다.
퇴직연금의 자본은 길게 보되 단단히 묶자. 장기 자금의 유입은 환영이지만 그만큼 거버넌스와 공시, 변동성 위험이 커진다. 연금의 신뢰는 한 번 흔들리면 오래간다. '돈이 들어온다'보다 '돈이 제대로 돌아간다'가 먼저다.
정책은 숫자로 말하고, 시장은 구조로 기억한다. 총량의 언어만으로 현장의 병목을 풀 수 없다. 트랙을 나누고, 첫 돈을 움직이고, 쏠림을 멈추자. 선의가 설계를 만나면 자금은 생태계가 된다. 설계를 잃으면 선의는 다시 애먼 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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