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한진리 기자] 빗썸의 비트코인 오지급 사태 이후 은행권의 가상자산거래소 대응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이번 사태는 기존의 리스크 관리 기조를 실제 계약 구조 변화로 이어지게 만든 '촉발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평가다. 표면적으로는 계약 기간 단축과 내부통제 강화 등 보수적 기조를 강화하면서도, 이면에서는 거래소와의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조건부 동거 전략'이 뚜렷해지는 양상이다.
국내 가상자산 시장이 업비트와 빗썸 중심의 양강 체제로 굳어진 점도 은행들의 선택지를 구조적으로 제한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특정 거래소와의 제휴를 끊을 경우 곧바로 고객 기반 이탈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2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은행은 최근 가상자산 거래소 빗썸과의 실명계좌 제휴 계약 기간을 기존 1년에서 6개월로 단축했다. 연 단위에서 반기 단위로 계약 주기를 줄인 것은 리스크 발생 시 관계를 신속히 재조정할 수 있는 '유연한 출구 전략'을 확보하려는 조치로 풀이된다. 계약 만기는 올해 9월 말로 설정됐다.
KB국민은행은 기존 이용자 계좌가 상당수 유지되고 있는 점을 감안해 계약을 즉각 종료하기보다는 '조건부 연장'이라는 절충안을 선택했다. 내부적으로는 금융당국 검사와 자금세탁방지(AML) 등 규제 리스크를 고려해 자산 보호 및 내부통제 요건을 한층 강화하는 방식으로 대응 수위를 높인 것으로 전해진다. 향후 6개월간 운영 경과를 점검한 뒤 추가 연장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다른 은행들도 상황을 주시하면서 전반적으로 '관계 유지 속 통제 강화'라는 유사한 대응 기조를 보이고 있다. 카카오뱅크는 코인원과 1년 단위 계약을 유지하며 올해 3분기 재계약을 앞두고 있고, 케이뱅크 역시 업비트와의 제휴를 이어가고 있다. 신한은행과 전북은행도 각각 코빗, 고팍스와 협력 관계를 유지 중이다.
특히 인터넷전문은행의 경우 거래소 의존도가 구조적으로 높다는 점에서 상황은 더 복잡하다. 케이뱅크는 업비트 투자자 예치금 유입을 기반으로 저원가성 수신을 확대해 왔다. 거래소 예치금이 사실상 핵심 자금 조달 창구로 기능하면서, 관계 단절 시 수신 기반 자체가 흔들릴 수 있는 구조라는 평가다.
금융권 관계자는 "케이뱅크는 거래소 예치금을 기반으로 외형을 키운 측면이 크다"며 "거래소와의 관계를 끊는 순간 조달 구조에 직접적인 충격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국내 가상자산 시장이 사실상 업비트와 빗썸 중심의 양강 체제로 재편돼 있다는 점도 은행들의 선택지를 제한한다. 코빗과 고팍스 등 후발 거래소의 점유율은 10% 미만으로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대체 가능한 거래소가 제한적인 시장 구조에서는 특정 제휴를 포기하는 것이 곧 영업 기반 축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은행들은 거래소 리스크를 인지하면서도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전략적 딜레마'에 놓여 있다. KB국민은행 역시 빗썸과의 계약을 단절하기보다 리스크를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통제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조정한 사례로 해석된다.
향후에는 은행과 거래소 간 협력 관계가 오히려 강화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최근 '1거래소-1은행' 원칙 완화 논의가 업계 중심으로 제기되면서 은행 간 거래소 유치 경쟁이 확대될 수 있다는 관측이다. 여기에 스테이블코인이 결제·송금 등 실사용 영역으로 확장될 경우 거래소는 단순 투자 플랫폼을 넘어 핵심 금융 인프라로 재평가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금융권 관계자는 "거래소 리스크가 부각되면서 은행들이 내부통제 강화를 요구한 것은 맞지만, 동시에 가상자산 시장 자체는 성장 국면에 있다는 인식도 강하다"며 "리스크 관리와 시장 선점을 동시에 고려하는 전략이 최선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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