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최지혜 기자] 부동산 자산운용업계의 패러다임이 전환하고 있다. 좋은 입지의 건물을 매입해 임차인을 채우는 전통적인 '임대업자'에 머물던 운용사의 역할이 기업의 경영 전략과 재무 구조를 분석하고 필요한 공간을 선제적으로 제안하는 '솔루션 파트너'로 재정의되고 있다. 데이터센터와 물류 인프라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이 전환은 더욱 가속화되는 양상이다.
◆ 블랙스톤, AWS에 데이터센터 포트폴리오 통째로 공급
8일 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최대 대체자산 운용사인 블랙스톤(Blackstone)은 최근 미국 버지니아주와 오리건주 일대에 보유한 데이터센터 6곳(총 면적 약 8만6400㎡, 전력 용량 114.5메가와트)을 담보로 5억5000만달러(약 7600억원) 규모의 CMBS 리파이낸싱을 완료했다. 해당 포트폴리오는 아마존웹서비스(AWS)가 100% 점유하고 있으며, 임대 연장 옵션을 포함한 총 임대 기간은 최대 21.5년에 달하는 초장기 우량 자산이다.
이같은 성과는 블랙스톤이 단순히 건물을 임대하는 수준을 넘어 빅테크 기업의 인프라 수요를 사전에 파악하고 맞춤형 공간을 제공하는 '빌드 투 슈트(Build-to-Suit)' 전략에 집중해온 결과다. 특히 AWS는 최근 루이지애나 등지에 120억달러(약 16조5000억원) 규모의 신규 데이터센터 캠퍼스 건설 계획을 발표하는 등 AI 인프라 확장에 사활을 걸고 있다. 블랙스톤은 테크 기업의 핵심 파트너로서 인프라를 선제적으로 공급하고, 이를 통해 확보된 안정적인 임대 수익을 바탕으로 자본 시장에서 대규모 자금을 수월하게 재조달하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하고 있다.
블랙스톤의 부동산 사업부 산하 ICS(Institutional Client Solutions) 조직은 단순한 자금 모집을 넘어 대형 테크·이커머스 기업의 인프라 수요를 사전에 파악하고 맞춤형 자산을 개발·공급하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 800명 이상의 부동산 전문 인력이 12개 글로벌 오피스에서 통합 운영되며 방대한 포트폴리오에서 축적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물류·데이터센터·주거 등 주요 자산군 전반에 걸쳐 투자 테마를 발굴한다.
◆ KKR, 기업 맞춤 BTS 전략으로, 데이터센터 설계
KKR 역시 같은 방향에서 더욱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KKR은 2020년 데이터센터 전문 개발 플랫폼인 GTR(Global Technical Realty)을 설립하며 초기 10억달러를 투입했다.
GTR은 구글, 아마존 등 하이퍼스케일러를 위해 맞춤형 데이터 센터를 설계하고 건설하는 데 집중하는 BTS(Build to Suite) 플랫폼이다. 대형 테크 기업과 사전 계약을 맺고 기업의 니즈에 맞춰 KKR이 투자자를 모아 자금을 대고 데이터센터를 공급하는 것이다.
올해 초 KKR과 오크힐캐피탈(Oak Hill Capital)이 GTR에 약 20억달러(약 2조7000억 원)에 달하는 추가 투자를 확정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GTR은 현재 유럽 전역의 주요 거점과 신흥 고성장 시장에 걸쳐 AI 워크로드와 클라우드 인프라 수요를 겨냥한 시설을 운영·개발 중이다.
◆ 힐하우스, 포트폴리오 기업 시너지로 '산업 특화' 공간 기획
아시아 최대 사모펀드 중 하나인 힐하우스(Hillhouse Investment) 역시 부동산 투자에서 차별화된 접근을 취한다. 힐하우스는 예일대학교 기금 등 북미의 주요 기관 투자자들로부터 조달한 글로벌 자본을 바탕으로 아시아 전역의 성장 테마에 투자하는 대표적인 아시아계 글로벌 펀드다. 이들은 지난 2017년 아시아 최대 물류 플랫폼인 GLP를 약 116억 달러에 인수하며 대체투자 시장의 큰손으로 부상했다.
최근 힐하우스는 실물자산 전문 부문인 라바 파트너스(Rava Partners)를 통해 아시아 시장의 인프라 공략을 가속화하고 있다. 특히 힐하우스가 2024년 인수한 물류 전문 플랫폼 로지캡(LogiCap)은 올해 1월 일본 휴릭(Hulic) 및 미쓰비시 지쇼 등 글로벌 자산가들의 자금을 유치하며 인도 내 현대식 물류 자산을 확보·운영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자리 잡았다.
힐하우스의 접근법이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한 부동산 운용을 넘어 헬스케어·소비재·테크 등 자신들이 투자한 포트폴리오 기업들의 산업 지식을 공간 기획에 직접 결합한다는 점이다. 바이오텍 기업에는 R&D 특화 연구 시설을, 이커머스 기업에는 공급망 최적화에 맞는 스마트 물류센터를 제안하는 등 특정 산업에 최적화된 공간 솔루션을 제공하며 자산 가치를 극대화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 이지스자산운용, CFT 신설…삼일PwC와 손잡고 '기업 공간 컨설팅' 나서
이같은 글로벌 흐름은 국내에서도 구체화되고 있다. 국내 최대 부동산 자산운용사인 이지스자산운용은 최근 CFT(Corporate Marketing Cross Functional Team)를 신설하고 기존 부서 간 칸막이를 허문 통합 조직 체계로 기업 고객 대응에 나섰다.
이지스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삼일PwC와 전략적 업무협약(MOU)도 체결했다. 양사는 이번 협약을 통해 ▲개발 자산 금융 ▲외국계 임차인 및 투자자 유치 ▲국내 기업(SI) 대상 자산 매각 ▲임대자문 전략 컨설팅 ▲데이터센터 개발·투자 자문 ▲부동산 업무환경전략 컨설팅 등 6개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했다. 이지스자산운용은 부동산을 단순 임대 공간이 아닌 기업의 비즈니스 성과를 지원하는 서비스 자산 모델로 전환하고, 기업의 사업 전략과 재무 구조, 자본 수요를 사전에 파악해 임차·투자·파트너십 등 기업 상황에 맞는 사업 구조를 초기 단계부터 함께 설계하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할 계획이다.
사옥 마련을 고민하는 대기업, 물류 효율화가 시급한 유통사, AI 인프라가 필요한 테크 기업 각각에 이지스가 보유한 포트폴리오를 연계해 최적의 솔루션을 제안하는 것이 CFT의 핵심 역할이다. 기업이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찾아오던 수동적 방식에서 고객사의 비즈니스 확장에 필요한 공간을 선제적으로 파악하겠다는 것이다.
◆ 빅테크 기업들의 경영환경 변화에 대응
글로벌 자산 운용사들의 전략 변화에는 빅테크를 중심으로 한 기업들의 경영 환경 변화가 맞닿아 있다.
이지스자산운용 CFT관계자는 "빅테크를 필두로 한 글로벌 기업들은 더 이상 자산을 직접 소유하기보다 전문 운용사를 통해 맞춤형 공간을 임대함으로써 재무 유동성을 확보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며 "데이터센터나 물류 거점을 직접 구축하는 대신, 운용사에 설계를 위탁하고 장기 임차하는 구조가 보편화되면서, 운용사는 단순한 임대인을 넘어 기업의 재무 전략을 뒷받침하는 핵심 파트너로 변화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부동산과 인프라의 경계가 무너지는 현상도 가속화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데이터센터와 스마트 물류 허브는 단순한 건축물을 넘어 고도의 전력망, 냉각 시스템, 광통신망이 결합된 복합 인프라 자산이다. 하이테크 인프라를 직접 기획하고 운영할 수 있는 하드웨어적 역량이 운용사의 새로운 진입장벽이자 핵심 경쟁력으로 부상하는 이유다.
업계 관계자는 "자본의 규모만으로는 변별력을 갖기 어려운 시대가 도래했다"며 "결국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그에 걸맞은 최적의 공간 솔루션을 선제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운용사만이 미래 대체투자 시장에서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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