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주명호 차장]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본인을 일컬어 "과격하지 않다"고 했다. 취임 직후 나왔던 그의 말은 반년도 안 돼 진위가 의심스러워지고 있다. 강하고 거센 표현이 섞여야 과격하다고 보는 건 일차원적 사고다. 어떤 의미로 해석되는지가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사실상 국민연금이 금융지주 사외이사를 추천토록 해야 한다는 그의 발언은 다분히 과격하다. 정부가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주장을 대놓고 꺼내든 것이나 다름 없어서다.
이 원장은 2018년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민간위원으로 위촉돼 약 5년간 활동했다. 그 시절에도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주창해온 강성파였다. 2019년 오너 일가의 각종 비리가 불거졌던 한진그룹(한진칼·대한항공)에 대해 독립적 사외이사 추천 등을 추진한 것이 대표적이다.
2021년에도 그는 삼성물산·포스코 등 7개 기업에 대한 사외이사 추천 주주제안을 발의해 주목 받았다. 7개 기업에는 4대 금융지주(KB·신한·우리·하나)도 고스란히 포함됐다. 당시 사모펀드 소비자 피해와 관련, 금융지주들을 일제히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문제기업으로 분류했다. 그의 주장은 국민연금 내외부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됐다. 준정부기관인 국민연금이 민간기업의 독립성을 훼손시킬 수 있다는 당연한 우려가 바탕이 됐다.
그가 올해 국정감사에서 언급했던 금융지주 회장들의 '참호 구축'은 타당한 비판이었다. 참호가 맞는지 여부를 떠나 논란을 야기했다는 점 자체가 개선이 필요하다는 방증이다. CEO(최고경영자)로부터 사외이사의 독립성 강화는 금감원이 지배구조 모범관행을 마련할 때부터 줄곧 강조해온 원칙이다.
하지만 국민연금 추천 사외이사는 그 해결책일 수 없다. 어떻게 포장하든 지배구조 승계에 관치가 작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형성된다. 정권의 의중이 먼저 반영되는 기업 이사회가 독립성을 담보할 수 있을 리 없다. 경영 능력보다 다른 요인이 승계 과정에서 더 우선시 될 수 있다는 외부 우려는 고정값이 될 지 모른다. 능력 중심이 아닌 기업의 경영승계는 주주가치를 떨어뜨리는 악재다.
투자자·주주들은 정부의 개입 신호에 민감하다. 금융회사에 정부 개입은 곧 지배구조 불안정으로 해석된다. 정치적 기조에 따라, 혹은 정권 교체에 따라 달라지는 리더십을 고평가하기 어렵다.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는 밸류업 프로그램의 동력에도 타격이 될 가능성이 높다. 결과적으로 주주들에게는 피해다. "전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이란 표현도 사실상 맞지 않는 셈이다.
현실화 가능성 측면에서 이 원장의 행보는 4년 전보다 더욱 과격해 보일 수밖에 없다. 노동계 대변자의 의견 개진과 국내 금융감독당국 수장의 일성이 지닌 무게감은 천지 차이다. TF를 통해 개선점을 찾겠다는 말은 곧 관치를 제도화하겠다는 노골적 수사로 읽힌다. 금융권이 심각한 불안감을 표출하는 것도 당연하다.
이 원장은 과격하지 않다는 발언에 더해 "혼자가 아닌 집단으로 의사를 결정하고 토론 과정을 거친 합의에 익숙하다"고도 했었다. 그는 기금운용위 위원 시절 스튜어드십 코드 활용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위원을 모두 갈아치워야 한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이번 국민연금 사외이사 안은 온전히 그의 의중이 반영됐다는 시각이 중론이다. 또다른 과격함의 방증일까.
ⓒ새로운 눈으로 시장을 바라봅니다. 딜사이트 무단전재 배포금지
Ho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