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이슬이 기자] 30년 넘게 기술 경영을 고집해온 청호나이스가 상속세의 벽에 부딪혀 결국 매각 수순을 밟는다. 창업주 고(故) 정휘동 회장의 갑작스러운 별세 이후 회장직을 승계한 부인 이경은 회장과 아들 정상훈 씨가 지분을 이어받았지만 수천억원에 육박하는 세액 마련을 위해 지분 매각이 불가피하다는 결정을 내린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노동조합이 상반기 총파업을 예고하며 매각 저지를 공식화한 만큼 노조 리스크를 해소하지 못할 경우 딜 완주에 상당한 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14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청호나이스 대주주 일가는 최근 글로벌 사모펀드(PEF) 운용사인 칼라일그룹과 경영권 매각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단독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매각 대상은 기존 정 회장 지분 75.1%, 계열사 마이크로필터 지분 13%로 마이크로필터는 정 회장이 지분 80%를 보유하고 있는 회사다. 현재 칼라일은 상세 실사 절차를 밟고 있으며 예상 매각가는 약 8000억원 수준이다.
◆ 세계 최대 수준의 실효세율… 줄줄이 승계 포기하는 강소기업들
이번 매각의 가장 직접적인 배경은 약 3000억원에 달하는 상속세 재원 마련이다. 현재 상속세 최고세율은 50%지만 상속재산이 주식인 경우 최대주주 20% 할증평가 적용으로 실제 상속세율은 60%로 비상장사의 경우 65%에 달한다. 가업상속공제 등의 제도가 있지만 산업 환경이 빠르게 바뀌는 현실을 고려하면 지분 감소 및 자산 처분 제한, 고용 유지 등 사후 관리 요건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다. 우량 중견기업일수록 승계 과정에서 대주주 지분이 급격히 희석되거나 재무적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어 경영권 프리미엄이 보장되는 시점에 지분을 매각해 현금을 확보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선택지가 된 셈이다.
세부담에 따른 승계 포기는 비단 청호나이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과도한 세금 부담을 이기지 못한 기업 창업주들이 사모펀드(PEF) 운용사에 경영권을 넘기는 사례는 이미 공식처럼 굳어졌다. 한때 세계 밀폐용기 시장 2위까지 차지했던 락앤락은 2017년 창업주 김준일 회장이 4000억원이 넘는 상속세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지분 전량을 매각했으며 한샘의 조창걸 명예회장 역시 지분 승계 시 발생하는 막대한 세금 부담과 지배력 약화를 우려해 PEF 운용사를 새 주인으로 맞았다. 세계 1위 손톱깎이 생산 업체였던 쓰리세븐(777)은 제약업체에 회사를 넘기기도 했다.
청호나이스는 33년 연속 흑자를 기록하며 내부에 쌓아둔 이익잉여금만 3670억원에 달하는 알짜 기업이다. 국내 가정용 정수기 시장에서 4위 수준을 달리고 있다. 상장사처럼 지분 일부를 시장에 매각해 현금을 마련하는 것이 불가능한 비상장사 특성상 거액의 배당금이 금융소득종합과세에 합산되면 곧바로 소득세 최고세율 구간을 적용받게 된다. 이 경우 지방소득세 등을 포함한 실효세율은 45% 이상에 달해 사실상 배당액의 절반 가까이가 세금으로 지출되는 셈이다. 단순 계산으로는 3000억원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회사가 6000억원 가까이를 배당해야 하는 셈이다.
물론 연부연납 제도를 활용해 상속세를 수년에 걸쳐 분할 납부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이 역시도 배당으로 충당하는 방안은 현실적으로 제약이 크다. 10년에 걸쳐 납부한다고 가정해도 매년 300억 원 이상의 현금이 필요한 데 배당소득이 종합과세 대상이 되는 구조를 감안하면 실제로는 매년 400억~500억원 수준의 배당이 요구된다. 장기간에 걸쳐 고정적인 현금 유출이 발생하는 만큼 회사 입장에서도 재무적으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 독보적 기술력에 베팅한 칼라일…노조 반발은 변수
칼라일이 청호나이스에 주목한 배경에는 독보적인 기술력이 자리 잡고 있다. 세계 최초의 얼음정수기를 선보이며 시장을 개척한 상징성은 물론, 정수기 렌탈 시장에서 다져온 안정적인 현금 창출 능력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특히 본체와 함께 핵심 제조 계열사인 마이크로필터를 동시에 인수함으로써 수직 계열화를 통한 원가 절감과 수익 구조 효율화를 꾀하겠다는 전략이다. 전 세계 수처리 시장의 성장세에 맞춰 마이크로필터의 B2B 제조 역량을 칼라일의 글로벌 네트워크와 결합, 해외 판로를 본격적으로 확장하겠다는 복안이다.
다만 실제 거래 성사까지는 노조 반발이라는 험로가 남아 있다. 현재 청호나이스 노조는 이번 협상을 '밀실 매각'으로 규탄하며 고용 승계 보장과 구체적인 매각 조건 공개를 요구하고 있다. 실사 과정에서 노조의 집단행동이 격화되거나 매각 이후의 처우 개선 합의가 지연될 경우 칼라일로서도 대규모 자금을 끝까지 투입하기엔 리스크 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지난해 MG손해보험 매각 당시에도 내부 노조의 강한 반발로 원매자가 실사조차 진행하지 못해 결국 인수를 포기한 전례가 있다. 상속세 납부 시한이라는 명확한 데드라인이 존재하는 만큼 대주주 측과 칼라일이 노조 리스크를 얼마나 신속하게 관리하며 시장의 신뢰를 확보하느냐가 이번 딜의 최종 성패를 가를 핵심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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