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사양산업으로 불리던 제지업이 코로나19 팬데믹을 맞아 재도약에 나서는 듯 했지만, 영업환경은 여전히 녹록치 않다. 원재료값과 전기료 등 고정비 부담이 증가하면서 수익성이 약화하고 있어서다. 특히 대부분의 제지사가 단일 사업에 의존하고 있는 만큼 미래 신성장 동력 확보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제지업계가 일부 상위권사를 제외하고는 자수성가형 오너일가가 절대적인 지배력을 갖춰 경영에 대한 견제가 제한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에 딜사이트는 국내 상장 제지사들의 재무 현황과 지배구조, 추후 과제 등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딜사이트 이세정 기자] '국내 골판지 업계 톱 4'에 이름을 올린 삼보판지가 압도적인 수익성을 달성하고 있다. 이는 창업주 세대가 일찍 매듭지은 지분 정리가 주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삼보판지는 창업주인 고(故) 류종욱 회장과 동생 류종우 대림제지 회장이 형제 경영을 펼쳐왔지만, 류종욱 회장 일가가 일찌감치 주도권을 잡으면서 가문 간 불필요한 소모전을 벌이지 않았다.
특히 삼보판지는 류종우 회장이 경영 전면에서 활동할 시기에 공격적인 사세 확장으로 안정적인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이를 두고 류종우 회장이 개인 회사인 대림제지의 고정적인 거래처 확보를 위해 삼보판지와 그 계열사를 활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 3형제 공동 창업…M&A·자회사 편입 등 원가방어력 확보
5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삼보판지는 올 상반기 말 연결기준 매출 2726억원과 영업이익 256억원을 기록했다. 매출로만 보면 아세아제지(4459억원), 태림포장(3452억원), 신대양제지(3220억원)에 이어 4위다. 하지만 삼보판지는 업계 최상위권의 이익 체력을 유지 중이다.
올 상반기 말 기준 삼보판지의 영업이익률은 9.4%로 집계됐다. 같은 기간 ▲아세아제지 5.4% ▲신대양제지 6.5% ▲태림포장 0.5% 수준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삼보판지의 우수한 수익성은 수직계열화를 통한 원가 경쟁력 확보에서 기인했다. 삼보판지는 2005년 1월 골판지원지 제조사인 고려제지(옛 화승제지)를 인수하며 안정적으로 원료 조달에 나섰다. 이어 2007년 동진판지와 한청판지, 삼화판지 등을 완전 자회사로 편입시키며 물류비 절감과 지방 영업망 확보를 확보했다. 나아가 2009년 대한폴리팩 공장을 경매로 인수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 결과 삼보판지는 올 상반기 말 골판지 업계 상위 5개사 가운데 유일하게 70%대의 매출원가율을 기록했다. 신대양제지와 아세아제지 원가율은 82%대로 집계됐으며, 한국수출공업은 86%로 나타났다. 아울러 태림포장의 경우 87%로 원가 부담이 가장 높았다.
류종욱·종우·종규 삼형제가 공동으로 창업한 삼보판지는 1981년 7월 법인 전환했으며, 2006년 3월 현재의 상호로 변경했다. 코스닥시장에 상장한 것은 1996년 5월이다. 삼보판지가 전자공시제도를 도입하며 최초 제출한 1999년도 회계기준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첫째인 류종욱 회장이 지분율 37.5%로 최대주주였다. 이어 둘째인 류종우 회장과 셋째인 류종규 삼보상공 회장이 각각 23.5%, 15.5%씩 보유했다.
◆ 2005년 류종욱 차남 류진호 '최대주주' 등극, 지분 우위 확보
제지업계에서 형제경영 체제인 회사는 비단 삼보판지 외에도 존재하지만, 결이 다르다 평가가 나온다. 예컨대 아세아제지의 경우 이병무·윤무 형제가 함께 그룹을 일궈왔지만, 사업 포트폴리오가 제지 뿐 아니라 시멘트, 레미콘 등 비교적 다양한 만큼 형제간 교통정리가 얼추 이뤄진 상태다.
반면 삼보판지의 경우 골판지원지와 상자 제조업만 영위 중인 터라 독립이나 분할이 쉽지 않은 상태다.
실제로 삼보파지 창업주 세대와 오너 2세는 2000년대 초반 주식을 사고파는 행위를 수차례 반복하는 등 미묘한 신경전을 벌였다. 이에 2004년 창업주 형제의 지분 격차는 14%포인트(p)에서 0.12%p까지 좁혀졌다. 특히 같은 해 10월 삼보판지 최대주주가 류종욱 회장에서 류종우 회장으로 변경됐으며, 약 1년 만인 2005년 9월 류종욱 회장 차남인 류진호 현 삼보판지 사장(16.4%)으로 다시 최대주주가 바뀌었다.
류진호 사장은 2003년부터 삼보판지 주식을 조금씩 매입해 왔지만, 부친의 지분 증여로 단숨에 16%가 넘는 주식을 보유하게 됐다. 류종우 회장 역시 장남이자 삼보판지 부장으로 일하던 류동원 현 동진판지 대표에게 자신이 보유한 주식 대부분을 넘겨주거나, 아들을 삼보판지 사내이사로 앉혔다. 하지만 류종욱 회장 일가가 지분 우위를 점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후계 구도가 정해지게 됐다. 당시 류종욱 회장 일가의 총 지분율은 30.1%였고, 류종우 회장 일가는 22.9%였다.
창업주 세대 막내인 류종규 회장이 특정 일가의 편을 들지 않았다는 점도 형제간 갈등이 불거지지 않은 이유다. 류종규 회장은 꾸준히 삼보판지 주식을 장내 매도하며 지분율을 낮췄고, 2010년 4월 기준 지분율은 10.6%(14만8900주)로 떨어졌다. 그는 조카인 류동원 대표에게 8900주를 증여했고, 나머지 14만주를 첫째 형에게 시간외매매로 정리하며 삼보판지 주식을 모두 털었다.
◆ 류종우 체제 아래 성장 본격화…개인회사 대림제지 성장 발판 '큰그림'
독특한 점은 삼보판지 창업주 세대가 지분율과 무관하게 번갈아가며 회사 경영을 맡았다는 점이다.
삼보판지 설립 초반에는 류종욱 회장이 이끌었고, 1987년 류종우 회장이 2대 대표에 취임했다. 2009년 류종우 회장 아들인 류동원 대표가 대표에 올랐으며, 2016년부터 류진호 사장과 사촌 경영 체제를 그렸다. 류진호 사장이 삼보판지 전권을 쥐게 된 것은 2017년 3월 류동원 대표가 사임하면서다. 특히 삼보판지가 인수합병(M&A)과 자회사 편입 등 사업 확장에 나섰던 시기는 류종우 회장이 경영권을 쥐고 있을 때다.
업계는 삼보판지 창업주 세대가 경영권 분쟁을 벌이지 않은 또 다른 이유로 대림제지를 거론한다. 류종우 회장이 1984년 매제(여동생 남편)인 권오달 부회장과 함께 골판지원지를 생산하는 개인회사 대림제지를 설립하면서 삼보판지 경영권을 탐낼 필요성이 없어졌다는 이유다.
특히 대림제지가 매출의 50% 이상을 삼보판지그룹 계열사에서 창출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대림제지는 2015년 말 기준 매출 547억원을 기록했는데, 이 가운데 52.7%에 달하는 288억원을 내부거래로 올렸다. 대림제지는 삼보판지와의 특수관계가 해소되기 전인 2018년까지 50% 안팎의 내부거래율을 기록했다.
업계 관계자는 "류종우 회장 일가가 류진호 사장의 경영권 승계 전까지 삼보판지의 경영을 잠시 맡아주면서, 개인 회사를 키웠다는 시각이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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