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사양산업으로 불리던 제지업이 코로나19 팬데믹을 맞아 재도약에 나서는 듯 했지만, 영업환경은 여전히 녹록치 않다. 원재료값과 전기료 등 고정비 부담이 증가하면서 수익성이 약화하고 있어서다. 특히 대부분의 제지사가 단일 사업에 의존하고 있는 만큼 미래 신성장 동력 확보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제지업계가 일부 상위권사를 제외하고는 자수성가형 오너일가가 절대적인 지배력을 갖춰 경영에 대한 견제가 제한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에 딜사이트는 국내 상장 제지사들의 재무 현황과 지배구조, 추후 과제 등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딜사이트 이세정 기자] 삼보판지그룹 창업주 고(故) 류종욱 회장과 동생 류종우 대림제지 회장의 가문이 '소유와 경영'의 완전 분리에 성공하면서 내부거래 규제에서 자유로워졌다. 두 가문의 특수관계가 해소되면서 계열사 간 거래 규모를 밝혀야 할 의무가 사라져서다.
삼보판지는 일찌감치 사업 수직계열화를 구축해 둔 터라 계열사간 내부 거래를 끊어내기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특히 삼보판지 지배구조상 내부거래가 증가할수록 원가 절감에 따른 이익 창출력이 높아지는데, 삼보판지의 배당 가능 여력이 확대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나온다.
◆ 50여년 만에 형제경영 이어 사촌경영 '종료'…2017년부터 준비
7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류종우 회장 장남인 류동원 동진판지 대표가 올 3월 삼보판지 비상근 사내이사에서 퇴임했다. 2004년부터 삼보판지 이사로 활동해 온 류동원 대표가 회사를 떠나면서, 삼보판지 이사회에는 류종욱 회장의 두 아들만 남게 됐다. 이로써 삼보판지그룹은 2018년 형제경영을 끝낸 데 이어 최근 사촌경영을 완전히 매듭지었다.
삼보판지는 류종욱 회장 3형제가 1973년 공동 설립했지만, 2005년 오너 2세이자 류종욱 회장 차남인 류진호 현 삼보판지 대표이사 사장이 최대주주에 오르면서 승계 구도의 얼개가 갖춰졌다. 류종우 회장은 형 가문에 회사 소유권을 내준 대신, 경영권을 행사하는 식으로 형제경영의 틀을 굳혀 왔다. 예컨대 류종우 회장은 사업보고서 제출 의무가 발생한 1999년 결산기 기준 삼보판지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 중이었으며, 장남에게 삼보판지 대표이사 자리를 물려준 뒤에도 등기임원직을 유지했다.
하지만 두 가문이 고려제지(옛 화승제지) 주식교환(스왑)에 나서면서 결별 가능성이 수면 위로 부상했다. 삼보판지는 2005년 고려제지 지분 60%를 180억원에 취득하며 계열사로 편입시켰다. 당시만 해도 삼보판지는 골판지 원지를 생산하지 않았으나, 고려제지 인수로 수직계열화 기반을 갖추게 된 것이다. 고려제지의 나머지 지분 40%는 류종우 회장 개인회사격인 대림제지가 120억원에 취득했다. 대림제지는 류종우 회장이 매제(여동생 남편) 권오달 부회장과 함께 1984년 설립한 골판지 원지 회사다.
삼보판지와 대림제지는 각각 상대 회사의 지분을 전혀 들고 있지 않지만, 오너일가의 관계성 때문에 특수관계로 묶였다. 특히 류종우 회장이 이 시기 삼보판지 등기임원으로 근무 중이라는 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고려제지는 삼보판지그룹 계열사로부터 상당한 규모의 일감을 받으며 고공 성장했다. 삼보판지그룹 소속이 되기 전인 2004년 말 기준 고려제지는 매출 797억원과 영업이익 30억원을 기록했다. 하지만 피인수 5년 만인 2010년 매출은 2배 이상 증가한 1702억원, 영업이익은 1.5배 늘어난 46억원으로 성장했다.
◆ 계열사간 실거래 지속…원가절감→이익 강화→배당 확대
고려제지의 주주 변동이 발생한 것은 2017년이다. 삼보판지는 기 보유 중이던 동진판지 지분 100%와 파주공장을 대림제지로 넘기는 대신, 대림제지가 보유하던 고려제지 주식 241만여주를 받기로 했다. 해당 거래로 삼보판지의 고려제지 지분율은 85.8%로 25.8%포인트(p) 상승했고, 대림제지는 동진판지를 활용해 골판지 원지 생산을 넘어 골판지 가공 및 판매까지도 할 수 있게 됐다. 현재 동진판지는 류동원 대표가 지배 중이다.
삼보판지와 대림제지가 각각 독자 생존할 수 있는 사업구조를 만들면서 형제경영 체제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실제로 삼보판지는 류종우 회장이 이 회사 등기임원직에서 물러난 2018년을 기점으로 대림제지를 기타 특수관계자에서 제외했다. 그가 더 이상 삼보판지 경영 과정에서 유의미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림제지 역시 삼보판지와 고려제지, 한청판지, 삼화판지를 특수관계자에서 빼버렸다. 이에 삼보판지 및 자회사와 대림제지는 양사 간 거래에 의해 발생한 매출과 매입 현황을 공개할 의무도 사라졌다. 다만 삼보판지는 류동원 대표가 사임한 올 들어서야 동진판지를 특수관계기업에서 배제시켰다.
주목할 부분은 류종욱 회장 일가와 류종우 회장 일가가 거느린 계열사들이 내부거래 공시 대상에서 제외됐을 뿐, 실제 거래가 줄어든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삼보판지 관계자 역시 "대림제지와의 거래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고 인정했다.
일각에서는 삼보판지와 대림제지의 내부거래가 증가할 가능성을 제기한다. 애초 삼보판지그룹이 골판지 단일 사업만 영위해 온 터라 계열사 일감 의존도가 높다는 태생적 한계가 있어서다. 삼보판지 내부거래는 안정적인 매출 증대 뿐 아니라 원가경쟁력에서 기인한 수익성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익 체력이 높아지는 만큼 배당 재원도 쌓일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배당 여력 확대에 따른 수혜는 오너일가가 가장 많이 누릴 것으로 파악된다. 삼보판지 주주 현황을 살펴보면 올 상반기 말 기준 류진호 사장을 비롯한 오너가 지분율이 65.6%로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삼보판지 주주들의 주주환원 확대 요구가 거세다는 점은 오히려 삼보판지 오너일가에게 이득이다.
삼보판지 측은 배당과 관련, "주주들의 요구로 최근 첫 중간배당을 결정하긴 했지만, 주주환원과 관련한 중장기 배당 정책을 수립하진 않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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